정지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12
한자 鄭知和
영어공식명칭 Jeong Jihwa
이칭/별칭 예경(禮卿),남곡(南谷)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우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13년연표보기 - 정지화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33년 - 정지화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7년 - 정지화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8년 - 정지화 홍문록(弘文錄)에 이름을 올리고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39년 - 정지화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40년 - 정지화 홍문관 교리(校理)에 이어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제수. 암행어사로 파견됨
활동 시기/일시 1649년 - 정지화 원주목사(原州牧使)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0년 - 정지화 진주사(陳奏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파견
활동 시기/일시 1652년 - 정지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3년 1월 - 정지화 사직
활동 시기/일시 1653년 9월 - 정지화 대사간(大司諫)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5년 - 정지화 광주부윤(廣州府尹)에 이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8년 - 정지화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9년 - 정지화 대사헌(大司憲)에 이어 대사간(大司諫)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61년 - 정지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62년 - 정지화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어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64년 - 정지화 도승지(都承旨), 호조참판(戶曹參判),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66년 - 정지화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파견
활동 시기/일시 1673년 - 정지화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74년 7월 - 정지화 우의정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74년 10월 - 정지화 우의정 사직,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79년 - 정지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80년 4월 - 정지화 좌의정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88년연표보기 - 정지화 사망
부임|활동지 원주목(原州牧) - 강원도 원주시
부임|활동지 광주부(廣州府) - 경기도 광주시
부임|활동지 전라감영(全羅監營) - 전라북도 전주시
부임|활동지 함경감영(咸鏡監營) - 함경남도 함흥시
부임|활동지 경기감영(京畿監營)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영천동
묘소|단소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東萊鄭氏林塘公派墓域) -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산32-2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東萊鄭氏林塘公派墓域) -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산32-2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동래
대표 관직 좌의정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개설]

정지화(鄭知和)[1613~1688]는 조선 후기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 관악산 기슭에 세거(世居)한 동래 정씨 문벌의 일원으로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예경(禮卿), 호는 남곡(南谷)이다. 중종 대 재상인 정광필(鄭光弼)의 5대손이자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증손이다. 조부는 좌의정 정창연(鄭昌衍),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광경(鄭廣敬), 어머니는 돈녕부도사 민유경(閔有慶)의 딸이다. 사촌으로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좌의정 정치화(鄭致和)가 있으며 형 정지화(鄭至和)의 아들 정재희(鄭載禧)를 양자로 들였다.

[활동 사항]

1637년(인조 15)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인조에게 초피(貂皮) 귀가리개를 하사받으면서 벼슬길에 나섰다. 이후 홍문관 부수찬, 교리, 사간원 정언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외직(外職)으로는 원주목사, 황해도관찰사, 전라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시에는 흉년에 백성들이 조정에 빌린 조곡(糶穀)의 이자를 감당할 수 없자 이를 면제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여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당상관으로 중앙에 돌아온 이후 대사헌, 대사간과 형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예조판서 재직 중이던 1673년(현종 14) 석전제(釋奠祭)[공자 제사]에 불참하고 영릉(寧陵)의 관리를 소홀히 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해 사대문 밖으로 방출(放出)되었다. 이듬해인 1674년(현종 15) 재서용되어 4월에 좌의정, 7월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숙종의 즉위 후 곧 사직하였다. 숙종 대에는 6개월간 좌의정에 재임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판중추부사와 영중추부사로 국정에 자문 역할만을 수행하다가 1688년(숙종 14) 사망하였다.

[묘소]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산32-2에 위치한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東萊鄭氏林塘公派墓域)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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