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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95
한자 成三問
이칭/별칭 근보(謹甫),매죽헌(梅竹軒),충문(忠文)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선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18년연표보기 - 성삼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38년 - 성삼문 식년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47년 - 성삼문 문과 중시 장원급제
활동 시기/일시 1453년 - 성삼문 좌사간 제수
몰년 시기/일시 1456년연표보기 - 성삼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91년 - 성삼문 신원
추모 시기/일시 1758년 - 성삼문 추증
묘소|단소 사육신 묘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191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민절서원 터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창녕
대표 관직 예조참의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가계]

성삼문(成三問)[1418~1456]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개성유후(開城留后) 성석용(成石瑢)이고,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달생(成達生)이다.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이고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활동 사항]

1435년(세종 17) 식년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38년(세종 20)에는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사가독서는 젊고 유능한 관료에게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을 주는 제도이다. 이때 박팽년도 함께 사가독서하였다. 1447년(세종 29)에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훈민정음 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세종 때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았다. 당시 세조가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지만 성삼문은 이를 사양하였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을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다.

1455년 예방승지로 있을 때, 세조단종을 위협하여 선위(禪位)를 강요하자, 성삼문이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자 세조성삼문을 차갑게 노려보았다고 실록에 전한다. 이후 아버지 성승이 비밀리에 지시하여 박중림·박팽년·유응부·허조·권자신·이개·유성원 등과 뜻을 같이 하여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함께 거사를 모의하던 김질이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알려 발각되었다. 성삼문세조를 나으리로 낮춰 부르며 거사를 모두 시인하였다. 갖은 문초를 당하고 아버지 성승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유응부·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처형당하였다. 성삼문의 집안은 어린 아이까지 모두 죽임을 당해 혈손이 끊겼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매죽헌집(梅竹軒集)』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묘소]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성삼문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691년(숙종 17) 9월에 숙종이 장릉(章陵)으로 거둥하다가 노량진에 들러 사육신묘 등에 치제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사육신 제향 사당을 ‘민절사’라고 사액하고 사육신 모두 복권되었다. 민절서원으로 고쳐진 것은 1692년(숙종 18)이다.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고 1791년(정조 15)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에 배향되었다.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쓴 「홍주성선생유허비(洪州成先生遺墟碑)」와 「연산성선생유허비(連山成先生遺墟碑)」가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4.01.24 내용 변경 [활동 사항]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하였다 → 처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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