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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사건 관련보고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52
한자 光州學生事件關聯報告書
영어공식명칭 Report of the 1929 Gwangju Student Movement by Japanese Police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원재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장처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상도동 511]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보고서
관련 인물 장재성(張載性)|장석천(張錫天)|김병로(金炳魯)|허헌(許憲)|황상규(黃尙奎)|부건(夫健)|권유근(權遺根)|박일(朴日)|임성환|권병동|하공건|박진갑|곽이형|강희옥|김인배|윤영순|이인실|주시영|김형석|권오덕|권유근|김창주|정종근|유축운|김재동|김기표|김수평|박용칠|최진환|강상덕|강대성|심흥택|한경석|허정숙(許貞淑)|박차정(朴次貞)|최복순(崔福順)|장홍염(張洪琰)|한전훈(韓典勳)|송계월(宋桂月)
발급자 일제 경찰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과 관련된 서울의 학생 및 기타 사상단체의 만세시위양상에 대한 일제 경찰의 보고서.

[개설]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는 1920년대 광주 전남 지역의 시위를 지도해온 사회주의 전위조직 성진회의 후신 독서회와 당시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했던 신간회 및 그 자매단체인 근우회의 진상조사단 파견, 조선학생회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학생대표 조사위원 파견 등의 노력에 힘입어 12월 2일 서울로 본격 파급되었다.

1929년 12월 2일 밤과 3일 아침 사이에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하여 중동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 동덕여자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기타 경성시내의 공립·사립학교 등지에 전단이 살포되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종로경찰서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12월 4일 지도급 학생 127명을 검거하고 13개처를 수색하여 격문 8,000매를 압수하였다. 이로써 서울 지역 학생 시위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단속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이 뿌린 전단지에는 이미 검거된 광주학생들을 즉시 석방하고, 식민지 노예교육을 당장 중단하며, 살인적 폭도인 일본의 이민자들을 추방하라는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12월 5일 서울의 수십 개 중등학교를 대표하는 3개 뿐인 공립학교 중의 하나인 서울제2고등보통학교에서 먼저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학우회의 자치, 조선역사의 고수, 조선어문법과 작문시간 편입, 광주학생에 대한 응원,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등을 내세우며 교문 밖 시위를 감행했으나 교직원의 필사적인 제지로 교내 시위로 그치고 말았다. 12월 7일 제1고등보통학교와 경신학교, 중동학교 등지에서도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하거나 거리로 나서서 만세시위를 감행했다. 이어서 보성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협성실업학교 등의 학생들도 시위에 나섰다. 이에 일제는 조기방학을 단행하고 학생운동을 탄압했다.

1930년 1월 15일 다시 서울 시내 각급 학교생 5,000여 명이 일제히 궐기하여 서울의 2차 학생시위가 단행되어 1차 시위 때의 3배가 넘는 학생들이 참여했다. 또한 1차 시위 때 소극적이었던 여학생들의 시위도 조직화, 본격화되었다. 경성여자상업학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등의 여학생들과 협성실업학교, 중앙기독교청년학관, 경성실업전수학교 등의 실업학교 학생들도 대거 시위에 참여했다. 여학생 시위의 조직화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최복순이 동급생 김진현, 최윤숙과 협의하고 근우회 서무부장이던 허정숙을 방문하여 상의함으로써 구체화 되었다. “경찰이 학교에 침입함을 반대한다, 식민지 교육정책을 철폐하라, 각 학교의 퇴학생을 복교 조치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때는 전문학교, 중등학교, 실업학교에 그치지 않고 보통학교의 어린 학생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1929년 12월 초와 1930년 1월 중순 등 2차례에 걸쳐 본격화된 서울 시내 각급학교 학생들의 시위에 당황한 일제 경찰은 인천의 경찰병력까지 동원하고 무자비한 구속을 단행하여 종로경찰서를 비롯한 서울 시내 경찰서와 구치소가 학생시위대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당시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일제 당국은 서울 시내 학생시위 운동의 양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주동자를 처벌하고 향후 예상되는 학생시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서울 시내 30여개 학교에서 일어난 2차례의 시위양상과 학생시위에 개입한 신간회, 근우회 등 학교 밖 사상단체 등의 동향도 파악하여 자세한 관련 기록을 도표로 작성하여 남기게 되었다.

당시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양선 목사는 1월 21일 3,000명의 학생들이 일시에 시위를 일으킨 평양 학생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감내해야만 했다. 해방 직후 김양선 목사는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설립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활동하면서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되어 1930년 전국의 학생운동으로 발전된 항일민족운동 관련 자료들을 최대한 수집하고 보관하였다. 이후 1967년 10월 숭실대학교한국기독교박물관 개관 때에 모두 기증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수십 건의 관련자료들이 보존되고 있다.

[제작 발급 경위]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일본인 중학생과 조선인 고등보통학교 학생들간에 조선 여학생에 대한 성추행을 계기로 발생한 집단 패싸움이 11월 3일 광주, 전남 지역의 학생시위로 번져갈 때부터 일제 당국은 이에 관한 신문의 보도를 통제하면서 광주 지역과 인근 나주, 목포 지역의 학생시위와 관련된 동향을 면밀히 파악하였다. 그러던 중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던 신간회, 근우회 등 사상단체와 조선청년동맹 및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 사회주의 학생전위조직들을 매개로 광주 전남 지역의 시위가 서울로 확산되었다. 이에 1929년 12월 5일 이후에 일제는 경찰과 관변조직을 총동원하여 매일 시위의 양상과 참여 학교 및 시위학생수 등을 파악하고 시위가 더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진압하고자 노력했다.

1930년 1월부터 2월 경에 작성된 「광주학생사건 관련보고서」는 서울 시내를 담당하고 있던 일제 경찰이 시위의 구체적인 양상을 파악하여 주동자를 처벌하고 관련 학교들에 일정한 징계를 가하면서 시위가 더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필요한 조처를 취하기 위해 작성한 학생민족운동 탄압용 보고서였다. 2020년 현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는 광주학생운동과 관련된 일제 경찰과 법원 등의 각종 보고서, 재판기록 등의 자료가 수십 건 정도 보관되어 있다. 이는 1929년 12월 5일경부터 시작된 평양에서의 학생시위가 1930년 1월 21일 남녀학생 3,000여 명의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게 된 이면에 당시 숭실전문학교에 다니던 김양선 목사가 비밀결사 단체인 청구회를 조직하고 배민수, 문학린 등과 함께 평양의 학생시위를 주도한 것이 배경이 되었다. 당시 김양선은 일제 당국에 검속되어 8개월간의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료수집에 힘을 기울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즉 1967년 10월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기증한 자료의 거의 대부분이 김양선 목사가 해방 전후부터 수집, 보관해본 자료였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김양선 목사가 직접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학생운동 관련 자료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최대한 많이 수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형태]

「광주학생사건 관련보고서」는 각각 28.3㎝×21.0㎝의 크기이고, 일문과 한문이 혼용된 세로쓰기 도표 형태로 17쪽만 남아 있으며 완본이 아니다. 다만 전체 쪽수와 유실된 쪽수가 어느 정도인지 현재로서는 추정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구성/내용]

「광주학생사건 관련보고서」의 서문에서는 1929년 광주에서 일본인 중학생과 조선인 고등보통학교생 사이에 일어난 집단 패싸움과 이를 계기로 일어난 광주, 전남 지역의 학생시위 및 이 시위가 서울로 번진 상황에 대해서 간략히 경과를 서술한 후 주요 사상단체와 관련 학교 등을 기록하였다. 또한 문건의 작성을 위해 「전선 맹휴사건(全鮮盟休事件)과 그 형사판결」, 「기보(旣報) 광주학생 비밀결사사건 통보」 등의 문건을 참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문은 도표로 이루어져 있는데, 도표의 제목은 ‘경성부 내에 있어서 불온행동을 드러낸 중등학교(광주학생사건 이후)’라고 되어 있다. 도표는 서울에서의 1, 2차 학생시위에 참여한 30개교의 각급 학교와 12개의 사상단체에 대해서 학교의 경우 학교명을 기록한 후, 일시·장소·인원·기타 등의 항목으로 불온한 행동으로 간주된 시위의 개요를 5단의 도표로 만들었다. 도표 첫 페이지에는 서울 시내 공립 중등학교인 공립 제1고등보통학교, 공립 제2고등보통학교, 공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등의 순서로 3개 학교의 관련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는 경성부 화동(花洞)에 소재하며 학생의 총수는 조선인 893명인데, 1929년 12월 7일 오전 9시 반, 3~4학년생 약 200명이 함성을 지르며 시위에 나섰고 교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했으며, 이중에 40명을 검속했다고 되어 있다.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는 경성부 청운동(靑雲洞)에 소재하며 학생의 총수는 조선인 640명인데, 1929년 12월 5일 교내에서 3~4년생 생필부(生必部)가 교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했으며, 12월 8일 교외에서 30명이 태극기를 손에 쥐고 흔들면서 시위했는데, 이중 30명을 검속하고 태극기 200본을 압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는 경성부 견지동(堅志洞)에 소재하고 있으며 학생의 총수는 조선인 378명인데, 1929년 12월 7일 오전 10시 반에 교내에서 4학년생 중 20명이 수업을 거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일제가 한국인을 신민화하기 위해서 세운 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앞장서서 시위에 나선 것에 대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공립 고등보통학교 뒤에는 계속해서 선린, 경신 등 사립학교들의 관련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데, 학생들이 교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하거나 이웃의 학교와 연합하여 길거리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던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보고서에는 시위로 문제가 되었던 학교의 위치가 표기된 지도도 첨부되어 있다. 이어서 경성부 내의 주요 사상단체들을 기록하면서 단체명칭, 소재지, 표면상의 목적과 기타로 구분하여 도표로 정리하고 있다. 신간회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만 기록상 남아 있으며 나머지 단체의 기록은 유실된 상태다.

[의의와 평가]

「광주학생사건 관련보고서」는 1929년 11월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민족 학생운동의 기세를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데 결정적인 기폭제의 역할을 했던 2차례 서울 지역 학생운동의 개요와 학교별, 관련 사상단체별 시위참여 인원, 주요 활동내용 등을 장소, 시간, 지도까지 정확하게 명시하여 기록했다. 이로써, 광주학생운동이 전 민족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경찰력과 사법당국의 온갖 폭력적 수단을 다 동원한 일제 경찰의 학생운동 관련 보고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서울 지역 학생운동의 구체적 실상과 전개과정 등을 상세히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학생 독립운동사 관련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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