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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백이에 얽힌 유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010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인식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노량진동에 걸친 지역에 대방장승이 서 있던 유래.

[개설]

장승백이대방장승이 서 있던 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고,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노량진동에 걸쳐 있으며, 지하철 7호선 6번 출구 앞에 표석을 세우고 장승을 다시 만들어 세웠다.

[장승의 성격]

장승은 통나무나 돌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새겨 마을이나 절의 입구 또는 길가나 고개 등지에 세운 목상(木像)이나 석상(石像)을 가리킨다. 보통 마을 입구에 세워 경계를 표시하였지만, 길가에 이수(里數)[거리를 ‘리’의 단위로 나타낸 수]를 적어 10리나 15리 등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 경계표지와 함께 이정표 구실을 하였다. 본래 마을로 들어오는 동구 밖에서 촌락을 해치려는 병액(病厄)의 귀신을 물리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촌락공동체의 수호신이었으나, 이정표의 구실을 함에 따라 나그네의 수호신으로 기능이 확장되었다. 개인의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면서 신성시되었으므로 함부로 건드리거나 손대지 않는다.

한국 전통사회에서는 흔히 장승이 서 있는 곳을 ‘장승백이’라 이름하였으므로 우리나라 각지에 ‘장승백이’라는 지명이 곳곳에 남아 있다. 장승백이에서는 마을 공동의 문제, 이를테면 동제(洞祭)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일을 의논하였다. 각 지역의 장승제는 동제 때 행하는데, 장승을 동신(洞神)의 하위신(下位神)으로 여겼으므로 맨 마지막에 제를 지내지만, 하위신인 만큼 기층 민중들과 밀접한 신이기도 하다. 경기도에서는 윤달과 관계없이 3년마다 한 번씩 제를 올린다.

장승의 명칭은 지역에 따라 다른데, 경기도·충청도 등지의 중부지역에서는 ‘장승’, 호남 지역에서는 ‘할아버지’·‘할머니’, 영남 지역에서는 ‘벅수’, 제주도는 ‘하르방’이라고 불렀다. 마을마다 직접 깎아 만들었으므로 모양도 지역에 따라 달랐는데, 악귀를 쫓는 효능을 높이기 위해 험상궂으면서도 익살스러운 얼굴을 선호하였으며, 나무뿌리 쪽이 머리가 되었다. 중부지역의 남자 장승의 얼굴 형태는 보통 사모(紗帽)를 쓰고 눈알과 코가 툭 불거진 채 이를 드러내고 있다. 장승의 복부에 쓴 기문(記文)도 지역에 따라 달리 표기되었는데, 경기도·충청북도 지역 일대의 남장승은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여장승은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썼다. 지역에 관계없이 장승의 기문에 ‘장군’·‘대장’ 등의 명칭이 공통으로 들어간 이유는, 잡귀의 침입을 막는 위용(威容)이 필요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나무장승은 비바람에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부식하므로, 매년 또는 2·3년마다 솟대와 함께 새로 만들어 세웠다.

[대방장승의 건립 경위]

서울특별시 동작구 장승백이의 장승은,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화성(華城)으로 성묘하러 가던 중 왕명을 내려서 세웠다 하여 ‘대방장승’으로 불리며, 팔도의 장승 중 최고의 우두머리였다. 장승백이는 본래 ‘장승이 박혀있는 곳[언덕]’이라는 의미의 ‘장승박이’였으나, ‘ㅣ’모음 역행동화 현상으로 음이 변형되어 ‘장승백이’가 되었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2동 삼거리의 구 노량진파출소와 우리은행 상도지점 앞을 ‘장승백이’라고 부르는데, 현재 장승이 서 있는 위치는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2동에 속한다. 이곳은 노량진동상도동·대방동이 접한 지역으로 조선 시대에는 노량진 선창(船艙)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은 조선 시대에는 번댕이[奧塘里]·번대방리(番大方里)로 불렸으며, 현 대방초등학교 자리에 큰 연못이 있었고, 이를 둘러싸고 마을이 형성되어 붙은 이름으로, 장승백이대방장승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은 근거가 없다. 장승백이의 장승은 옛 경기도 시흥군(始興郡)[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과 옛 경기도 과천군(果川郡)[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두 고을 경계에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노량진동에 걸쳐 있어 두 곳의 경계를 가르며, 현재의 장승배기로상도로의 교차점을 말한다. 이곳에 장승을 세우게 된 내력으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조선의 제22대왕 정조는 즉위한 후, 뒤주 속에 갇혀 비통하게 죽은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존호(尊號)를 장헌(莊獻)으로 고치고, 묘소도 현 경기도 화성시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으로 격상한 뒤 전배(展拜)[궁궐·종묘·문묘·능침 등에 참배함]를 다녔다. 현륭원으로 향하는 정조의 어가(御篤)는 현 장승백이 지점에서 한번쯤 쉬어가야 했다. 당시 장승백이 일대는 나무숲이 우거졌으며 인가도 없고 인적마저 드문 한적한 곳이었으므로, 쉬어가기에는 매우 적막하였다. 이에 정조는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壯士) 모양을 한 남자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이라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자 장승을 세워 ‘지하여장군’으로 하여라.”라고 명하였다. 이 어명으로 장승백이에는 임금의 원행(園幸)[왕세자나 세자빈 및 왕의 친족 등의 산소에 감]을 편하도록 하기 위해 두 개의 높다란 장승을 세웠다. 이때부터 이곳이 ‘장승백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정조는 원행 길에 이 장승 앞에서 어가를 멈추고 잠시 쉬어 갔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과 달리, 영조 재위 시절인 1760년대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에 ‘장생현로(長栍峴路)’가 이미 등장하므로, 장승백이의 정승은 정조 이전부터 있었으며, 정조와 얽힌 이야기는 전설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장승을 소재로 삼은 판소리 「변강쇠가」와 서도창(西道唱)[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서 불리는 긴 노래의 잡가] 「변강쇠타령」에도 장승백이의 장승이 팔도장승의 최고 우두머리인 대방장승으로 등장하면서,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타난다. 서도창 「변강쇠타령」에서는 변강쇠가 엄동설한에 땔거리가 없어 땔나무하러 첩첩산중에 갔는데, 눈 속에 땔나무를 얻지 못하자 길가에 세워 놓은 장승을 패가지고 오는 광경을 풍자하면서, 변강쇠한테 도끼로 찍혀 부서진 장승이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변강쇠타령」의 원제는 ‘가루지기타령’인데, 일설에 따르면 ‘가루지기’라는 말에는 “시체를 거적에 말아 진다”는 뜻이 담겨 있고, “장승을 베어 가로진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신재효본(申在孝本)으로 정착되어 있는 「변강쇠가」는 서도창 「변강쇠타령」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신재효본에서 전하는 사설에는, 전라도 출신의 잡놈인 변강쇠와 평안도의 음녀(淫女)인 옹녀가 황해도 청석골에서 우연히 만나 당장 부부가 되었으나 워낙 게으른 변강쇠가 재산을 탕진해 결국 경상도 함양(咸陽)의 지리산 자락에서 화전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날마다 잠만 자던 변강쇠가 어느 날 옹녀의 성화에 못 이겨 나무를 하러 가지만, 산에서 낮잠만 실컷 자고서 빈손으로 돌아오다가, 옹녀의 잔소리가 걱정되었는지 장승 하나를 빼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깜짝 놀란 옹녀가 장승을 때면 장승동증에 걸려 죽는다고 극구 말렸지만 변강쇠는 장승으로 군불을 때워버렸다. 불에 타버린 지리산의 장승 귀신이 서울로 올라와 장승들의 우두머리인 장승배기 대방장승을 찾아가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였다. 이에 대방장승은 변강쇠를 응징하기 위해, 팔도의 장승들에게 한강변 새남터에 집결하라고 통지하여 장승대회를 소집하였다. 새남터에서 시흥까지 꽉 메운 이 장승대회에서는 의논 끝에, 모든 장승이 변강쇠에게 오장육부를 비롯해 온 몸 구석구석에 병을 하나씩 넘겨주는 최고의 형벌을 내렸고, 변강쇠는 갑자기 수백 가지 병을 앓다가 사망하였다.

민화(民畫)에 따르면, 장승들끼리는 전국에 걸친 연락 체계가 구축되어 있어, 지나던 길손에게 굴욕을 당한 장승이 대방장승에게 고소를 넣으면, 사안을 평가한 장승위원회의 판결로 해당 가해자에게 수많은 질병을 내려 응징하였다. 변강쇠의 예는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장승에게 해코지를 하여 질병에 걸린 자가 그 병을 낫게 하려면, 막걸리와 북어대가리를 갖다 바치고, “장승님 제가 잘못했어요!”라고 빌면서, 장승귀를 잡고 입을 맞추면 병이 낫는다고 하는데, 장승을 패어 땐 변강쇠는 전국 장승의 분노를 사서 죽음에 이르렀다.

변강쇠가 패어 땐 장승은 함양장승이지만, 함양장승이 복수를 청원하는 대방장승의 위치는 경기도의 노강(鷺江) 선창으로 통하는 길목[지금의 노량진을 뜻한다]이었다. 「변강쇠가」에는 팔도의 삼백 열 고을의 장승 사이를 넓게 연계하는 조직을 갖고 있는데, 팔도의 장승을 총괄하는 장승대통령을 ‘대방(大方)’이라 불렀는데, 바로 노량진 선창 장승백이에 서 있던 장승이 대방장승이었다. 그리고 이 아래에 대방장승의 명을 전달하는 용인 사근내(沙斤乃)와 수원의 지지대(遲遲臺)의 장승이 있었다.

[장승의 수난과 복원]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에게 신앙의 대상이었던 장승을 ‘악마의 기둥[devil post]’이라고 부르자,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에 편승하여 장승을 우상과 미신으로 간주·배척하면서 장승의 수난사가 시작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장승제뿐만 아니라 산신제와 성주·터주신 등 한국의 풍속과 민간신앙 등을 우상 숭배로 몰아쳐 배척하였는데, 이러한 몰이해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에도 이어졌다. 1930년대에 일제는 ‘미신 타파’라는 미명 아래 전국의 장승을 없애면서 장승은 일대 수난을 겪으면서 사라졌다. 이로 인해 보존이 오래가는 석장승도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10개의 석장승이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장승백이의 장승은 8·15해방 후 다시 복원되었지만 6·25전쟁 때 다시 사라졌고, 1982년에는 장승공원이 만들어지기도 하였지만 이 자리에 동작도서관이 건립되는 관계로 오래 가지 못하였다. 지금의 장승백이 장승은 1991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이곳에 처음으로 장승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은 1987년 서울시가 유적지 보존 차원에서 ‘장승백이’ 기념표석을 세우면서 비롯되었다. 그러다 1991년 4월 말 노량진2동 바르게살기협의회 회원 등 주민들이 동네 지명에 걸맞도록 동작도서관 앞에 장승을 건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마침내 이해 10월 24일 옛 장승이 있던 자리인 장승백이 3거리에 높이 4m, 둘레 60㎝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세우고, 노량진2동 바르게살기 협의회가 주최하여 매년 10월 24일 장승배기 장승제를 열고 있다. 장승백이의 장승은 지명이 제 값을 하게 해야겠다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세워졌지만, 안착되는 과정은 출발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이해 9월 들어 개신교 동작구 교구협의회 소속 목사·신도들이 ‘우상숭배’라며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서자 한 달 이상 장승 건립이 지체되었고, 장승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동네 빈터에 방치되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며칠 후 서울 동작구 기독교청년회 소속 회원 70여 명이 ‘장승철거를 위한 연합기도모임’을 거행한 뒤, 11월 2일 새벽 지하여장군이 방화로 인해 몸체가 불에 탄 채 발견되었다. 1994년 1월 23일 새벽에도 신원 불명자가 전기톱으로 지하여장군의 몸체를 자르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동년 3월 3일 동작도서관 앞에 ‘지하여장군’으로 복원되었다. 현재의 장승은 2012년 제22회 장승제를 지내면서 새로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을 만들어 세웠는데, ‘지하여장군’을 ‘지하대장군’으로 바꾼 이유는 ‘천하’와 ‘지하’가 각각 음과 양을 의미하기 때문에, ‘여장군’이라는 ‘음’의 의미를 첨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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