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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009
한자 -龍驤鳳翥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웅호

[정의]

정조가 현륭원에 참배하기 위해 한강을 건넌 후 쉬어갈 목적으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에 세운 정자.

[정조의 화성 행차]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휼륭한 세자였음을 입증하는 데 평생 동안 노력하였다. 아버지 시호를 ‘사도(思悼)’에서 ‘장헌(莊獻)’으로 바꾸어 ‘임오화변(壬午禍變)의 그림자’를 없앴다. 아버지 무덤인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신주를 봉안한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경모궁(景慕宮)으로 개칭해 위격을 높이는 한편 경모궁을 창경궁 동쪽의 함춘원에 대대적으로 신축하였다. 그 절정은 1789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겨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의 현륭원(顯隆園)[‘현부의 은혜에 융성하게 보답한다’는 의미]으로 조성하고, 현륭원 조성으로 팔달산 아래로 옮겨가는 수원[화성]을 첨단 기법을 동원해 성곽과 행궁을 갖춘 신도시로 건설한 것이다. 현륭원 조성 이후 정조는 해마다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華城)으로 거둥하였다. 화성 행차 때 한강을 건넌 곳이 노량진이다. 정조노량진에 놓인 배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넌 후 한강 남쪽 언덕에 건립한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서 점심을 들거나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화성을 향한 발걸음을 이어갔다.

[배다리 설치와 용양봉저정 건립]

한강을 건널 때 배다리를 설치한 것은 정조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태종이나 연산군 때도 배다리를 놓고 한강을 건너가곤 했다. 그러나 당시에 설치했던 배다리는 많은 배들을 촘촘하게 배열한 후 묶는 방식이어서, 배 간격을 일정하게 띠우고 긴 나무를 활용해 좌우의 배를 연결하는 정조 때의 방식과는 달랐다.

1789년(정조 13) 10월, 정조는 뚝섬에 배다리를 설치하였다.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상여가 한강을 건널 때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만든 배다리는 큰 배 77척을 나란히 배열하여 대나무와 칡 끈으로 연결하고, 배 위에 모래와 흙을 깔고 잔디를 덮는 방식으로 이전의 배다리 설치 방식과 같았다. 이때의 경험으로 정조배다리의 효율적인 설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배다리 전담 관청의 설립과 건설 지침의 마련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12월, 정조배다리 관리를 전담할 관청으로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였다. 현륭원 조성 이후 매년 한 차례 이곳을 참배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또 배다리 설치에 필요한 각종 장비들을 보관하기 위해 노량진에 70칸 규모의 창고도 건립하였다.

배다리 건설 지침을 마련하는 작업은 1789년 말 묘당에서 21개 항목의 ‘주교절목’을 작성해 올린 것에서 본격화하였다. ‘주교절목’을 검토한 정조는 해당 내용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자 직접 『주교지남』이란 책자를 펴냈다. 『주교지남』은 첫머리에 정조의 어제문(御製文)이 위치하고, 이어서 묘당에서 올린 ‘주교절목’의 21개 항목을 하나하나 비판한 ‘묘당찬진주교절목논변(廟堂撰進舟橋節目論辨)’과 그 대안으로 정조가 제시한 15개 항목으로 구성된 책자이다. 그러나 『주교지남』의 저술로 지침 마련 작업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몇 차례 배다리 설치 경험을 반영하여 1793년(정조 17) 1월, 주교사에서 36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주교개정절목’을 작성해 올림으로써 마침내 그 작업은 끝나고, 이후에는 이 절목의 규정에 따라 배다리를 설치하고 관리하게 되었다.

배다리 설치 경험과 지침 마련 과정을 통해 정조 때 정비된 ‘배다리 제도’는 1795년 화성 행차 때 십분 활용되었다. 당시 정립된 배다리 제도를 살펴보면 먼저, 배다리를 설치할 장소는 노량진으로 정하였다. 강 양쪽에 높은 언덕이 있어 선창(船艙)을 만들기에 적당하고, 강물의 유속이 평온하며, 무엇보다도 강폭이 좁아 설치하는 데 비용이 절약되기 때문이었다. 배다리 설치에 사용할 배는 한강을 드나드는 개인이 소유한 배와 훈련도감 배 80척을 이용하였다. 이 중에서 큰 배 36척은 배다리 몸체를 만드는 데 들어갔다. 배다리 정중앙에 있는 배의 높이가 가장 높고 남북 양쪽으로 갈수록 낮아지게 하여 배다리가 무지개 모양이 되게 하였다. 배를 쉽게 모으기 위해 배의 정박 장소를 파악하여 주교사의 장부에 기록하였다.

배를 연결할 때에는 세로목인 종량(縱樑)과 가로목인 가룡목(駕龍木)을 활용하였다. 배가 연결되면 그 위에 판자를 덮고 모래와 잔디를 깔았으며, 판자의 양쪽 끝에 추락을 방지하고 미관을 좋게 하기 위해 난간을 설치하였다. 또 강의 양안에 잡석을 쌓고 그 틈을 석회로 메꾸어 선창을 만들고 선창과 배다리 사이를 움직이는 선창다리로 연결하였다. 선창다리는 종량 위에 수십 장의 판자를 깔고 선창다리의 종량과 배의 종량을 연결시켰다. 이때 종량은 요철 모양으로 깎고 중간에 빗장을 질러 자유롭게 구부러지거나 펴지게 하였다. 배다리에는 3개의 홍살문을 중앙에 하나, 배다리가 시작되는 남북에 각각 하나씩 설치하였고, 중앙의 홍살문 양 끝에는 두 개의 큰 깃발을 세웠다. 36척의 배에도 여러 용도의 깃발들이 꽂혀 있었다.

한편 용양봉저정은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10-30번지, 한강대교 남쪽 노들나루공원[노량진배수지공원] 건너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정자는 1789년(정조 13)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2년 후인 1791년에 완공하였다. 정조가 현륭원을 참배하러 갈 때 노량진배다리로 건너 잠시 휴식을 취하던 행궁(行宮) 역할을 수행하였기에 노량행궁으로도 불린다.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먹기도 하여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하였다.

정조가 지은 「용양봉저정기(龍驤鳳翥亭記)」를 보면 왜 정자 이름을 ‘용양봉저’라 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북쪽은 높은 산이 우뚝하고, 동에서는 한강이 흘러와 마치 용이 꿈틀꿈틀하는 것 같고, 봉이 훨훨 나는 듯하다. 찌는 듯한 광영(光榮)이 상서로운 기운으로 엉기어 용루(龍樓)와 봉궐(鳳闕) 사이를 두루 감싸고 있으면서 앞으로 억만년을 이어가도록 공고히 할 것이니 그렇다면 그 상서로움이 어찌 얼음이나 오색화 따위 정도이겠는가. 이에 대신(大臣)에게 ‘용양봉저정’이라 크게 써서 문지방 위에 걸게 하였다.” 한양의 북악과 한강이 서로 어우러지는 것이 마치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날아다니는 모습과 흡사한데, 이 상서로운 기운이 억만년 이어갈 국가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용양봉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정자 현판은 정자를 세운 2년 뒤인 1793년(정조 17)에 걸었다.

정조는 이 정자에서 바라본 한강과 주변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내가 그 정자에 올라갔더니 때마침 먼동이 트고 해가 떠오를 무렵이어서 붉은 구름이 뭉게뭉게 떠오르고 새하얀 비단이 맑게 깔려 있어 마치 떨어지는 것 같고, 공수(拱手)하고 있는 것도 같고, 상투 같고, 쪽진 것도 같은 강 주위의 여러 봉우리들이 발과 안석(案席) 사이로 출몰하면서 해기(海氣)가 비치고 있고, 천리나 푸른 출렁이는 바다는 곧 손에 닿을 듯이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다 거두어들일 것 같았다. 내 그것을 보고서야 그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정자의 조망이 좋다는 것도 알았다.” 정자에서 하룻밤을 묵고 난 후 새벽녘에 해맞이를 하면서 바라본 정취를 기록한 것이다.

이 정자는 일반적인 누정과 마찬가지로 언덕 위에 자리 잡아 경관이 수려한 한강을 내려다보도록 지은 것은 비슷하지만, 풍류를 즐기며 심신을 수양하려는 목적에서 건립한 것은 아니었다. 정조 스스로가 “이 정자는 부교(浮橋)를 위해 필요한 것이지 시인이나 일 없이 노는 선비들이 흐르는 물을 보고 시원함이나 느끼고 마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듯이, 수원 화산에 자리 잡은 현륭원에 참배를 가는 도중 잠시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용양봉저정의 건축 형식]

이곳은 원래 선조 때 우의정을 역임했던 이양원(李陽元)의 별서였다. 행궁으로 쓰일 때는 정문과 누정 등 건물이 두세 채 있었는데 지금은 정자만 남아 있다. 정자는 장대석 외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사각 기둥으로 세워졌는데,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정면 6칸 규모의 정자 건축은 일반적으로 보기 어려운 형식이다. 왕이 머무는 곳이어서 궁궐 건축 형식을 적용하여 이처럼 규모가 커졌다.

정면 6칸이라고 하지만 건물 동쪽과 서쪽의 양끝 한 칸은 다른 기둥 사이보다 폭이 좁은 툇간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부분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단일 공간으로 된 마루방이다. 마루방의 외벽을 이루는 곳 정면과 뒷면에는 사분합문을, 양 측면에는 삼분합문 둘을 기둥 사이에 달았다. 전면 동쪽의 두 칸은 바닥까지 내려온 문이고, 정면 서쪽 2칸과 뒷면 4칸, 양 측면에는 모두 머름이 설치되었다.

마루방 바깥 동·서·북쪽 둘레는 툇간을 두고 마루로 꾸며 밖으로 트이게 하였다. 정면 중안 4칸은 디딤돌을 통해 마루로 올라가게 되었으며, 좌우 협간 바닥은 한 단 높여 기둥 사이에 아(亞) 자 난간을 둘렀다. 건물의 남쪽 중앙 4칸 밖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그런데 가운데 마루방 4칸이 본래부터 구들을 놓지 않고 마루방으로만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미심쩍은 면이 있다.

이 정자는 겹처마이고 좌우의 합각을 벽돌로 처리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하인방 아래와 기단 사이는 벽돌로 막았다. 가구(架構)는 기둥머리에 초익공을 결구하고 2중 보를 둔 오량가(五樑架)이다. 익공은 창방 위치에서 직각으로 밖으로 길게 나와 끝부분이 수서로 처리되었고, 안으로는 보아지가 퇴량을 받쳤다. 창방과 장혀 사이는 소로로 받쳤으며, 대량 위에서 종량을 받치는 보아지는 운공으로 처리되었고, 종도리를 받치는 파련대공도 보아지와 같이 조각되었다.

[근대 이후의 용양봉저정 활용]

용양봉저정은 처음 지어질 때 정문이 있고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정자만 남아 있는데, 그 면적도 30㎡에 불과하다. 건물 뒤편 한쪽에 모아 놓은, 잘 다듬어진 주초석들이 본래 건물이 더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정자는 고종 때 유길준(俞吉濬)[1856-1914]에게 하사되었다. 그 후 1930년 일본인 이케다[池田]의 손에 들어가면서 건물 일부를 철거하고 부근에 온천장, 운동장, 식당 등을 두어 오락장으로 삼고 그 이름도 ‘용봉정(龍鳳亭)’으로 바뀌었다. 1936년에는 요정으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광복과 함께 이곳을 국가 소유로 환원하고 오락 시설을 철거했으며, 명칭도 원래의 이름인 ‘용양봉저정’을 회복하였다. 현재는 동작문화원에서 향토문화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2020년부터 서울특별시 동작구에서 ‘용양봉저정 일대 관광명소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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