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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의 못자리, 솔뫼 성지 -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이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순례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440
한자 韓國天主敎-聖地韓國-司祭金大建神父-誕生地--敎皇-巡禮地
영어공식명칭 Seed Bed of Korea Catholic Church, Solmoe Holy Ground-Birth Place of First Korean-born Catholic Priest Kim Taegon and Pilgrimage Place of Pope Francis
이칭/별칭 김대건 신부 탄생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정환

[정의]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이며 2014년 8월 프란체스코 교황이 방문한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천주교 성지.

[개설]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있는 솔뫼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 성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솔뫼 성지는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일뿐만 아니라 솔뫼 출신 인물들과 관련 신앙인들의 활동과 순교가 한국 천주교에 끼친 영향이 상당하기에 일찍부터 주목받는 장소였다. 조선 후기에 솔뫼는 서해 바다와 연결된 하천의 지류를 통해 만조 때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유입되는 지역이었다. 지금은 모두 개간되어 평야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포구가 가까이 있어 외부와의 소통이 용이한 지역이었다. 지금도 솔뫼 성지가 위치한 송산리 2구에는 ‘하포(下浦)’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2014년 8월 한국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Asian Youth Day)에 함께하기 위해 방한한 프란체스코 교황이 방문한 천주교 성지이다.

[솔뫼 인근의 천주교 역사]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1784년 이승훈이 중국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승훈이 돌아와 서울에서 첫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동료들과 선교 활동을 함으로써 천주교가 확산되었으나 처음부터 모든 지역에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4개 지역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먼저 생겨났는데 조선의 중심인 서울, 경기도 양평과 여주 일대의 양근 지역, 전라도 전주와 진산 일대의 호남 지역, 그리고 충청도의 내포 지역이었다.

일반적으로 천주교 신자의 기준은 세례를 받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런데 내포 지역에는 독특하게도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천주교를 실천한 인물이 있었다. 1736년에 태어나 예산에 거주하던 홍유한(洪儒漢)이다. 홍유한성호 이익(李瀷)[1681~1763]의 제자였는데 중국에서 수입된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고 1770년경부터 혼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7일마다 주일(主日)[일요일]이 온다는 것을 알고 음력으로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을 경건하게 지내며 기도에 전념하였다. 화려한 음식을 피하는 등 스스로 절제의 생활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약한 이들을 돌보는 선행을 실천하였다. 13년간 고향을 떠나 소백산에 거주한 적도 있으나 예산으로 다시 돌아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홍유한의 신앙 실천은 조선에 첫 신자 공동체가 생겨난 1784년 이전부터 내포 지역에 천주교가 잘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세례를 받은 내포 지역의 첫 신자로는 여사울[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출신의 이존창을 꼽는다. 이존창은 내포 지역을 왕래하는 실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를 접하여 1784년 무렵 세례를 받았다. 이존창은 고향 여사울을 중심으로 천주교 전파에 나섰는데 충청 감사 박종악이 1791년에 작성한 『수기(隨記)』에 의하면 여사울에 있는 100여 호의 가구 중에서 80호가 천주교에 물들었다고 할 정도였다. 여사울은 내포의 중심이 되는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마을인데 주로 이 물줄기를 따라 인근에 천주교가 확산되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지역 사람들은 진보적 실학자들에 의해 일찍부터 서양의 책들과 문물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를 쉽게 받아들일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내포 천주교는 평민들이 주도하는 민중 종교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다른 지역의 천주교가 양반이나 중인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졌던 반면 내포 신앙공동체는 처음부터 달랐다. 첫 신자인 이존창이 평민[박종악의 『수기』에는 사노비 출신이라고 언급]이었고, 이존창과 더불어 지도자의 역할을 한 사람들도 대부분 평민이었다. 그들이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신분과 남녀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사람들을 대우함으로써 소외된 계층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점차 늘어났다.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인 천주교는 조선에서 전통적으로 지켜 오던 이념과 가치 질서와 충돌할 요소들이 많았다.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것은 제사를 금지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이었다. 당시에는 제사 안에 미신적인 요소가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어 제사를 금했고, 이것이 천주교가 박해를 받는 첫 번째 요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신자들의 새로운 생활 방식도 큰 문제가 되었다. 내포 신자들을 포함한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실천은 조선에서 중시하던 신분 질서와 남녀 관계를 뛰어넘는 행동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앙 실천은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선구적인 모습으로 보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의 충청 감사 박종악은 『수기』에 “대저 이 술법을 하는 자는 서로 교중(交中)이라 부르며 노비와 주인이 존비의 구분도 없고, 멀고 가까운 사람이 친소의 구별도 없습니다. 남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양반가의 규수가 언문[한글]으로 풀이하여 읽으면 천한 어리석은 부녀자가 입으로 전해 외웁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신자들의 행동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신분 질서와 남녀 사이의 관계를 깨트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전통 질서의 유지라는 조선의 현실적인 문제와 새로운 종교의 도입에 따라 생겨난 갈등으로 천주교는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김대건 신부 집안과 순교자들]

김대건 신부의 김해 김씨 집안은 내포 지역에 천주교가 전해지기 훨씬 전인 1583~1655년 사이에 솔뫼로 이주하여 살았다. 대를 이어 정착하여 살던 중 1780년대 후반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내포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자 김대건의 집안도 신앙을 받아들였다. 제일 먼저 김대건의 작은할아버지 김종한[안드레아]이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이어 김대건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비오]가 입교하면서 집안 전체가 신자가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신앙의 역사는 조선 후기 내내 지속된 천주교 박해와 더불어 순교의 역사로 이어진다. 솔뫼와 관련된 순교자는 모두 11명으로 그중 세 명이 1984년 5월 6일 성인품(聖人品)에 올랐으며, 두 명이 2014년 8월 16일 복자품(福者品)에 올랐다. 이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진후(金震厚)[1738~1814]

1783년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세례명은 비오(Pius)이고 김대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다. 김진후는 맏아들이 제일 먼저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 처음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다가 입교한 후에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입교 초기에는 큰 난관에 부딪히지 않았으나 1791년 진산[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서 윤지충[바오로]이 제사를 거부한 사건이 발생하자 솔뫼에도 박해가 일어났고 김진후는 네다섯 차례 검거되며 신문과 석방을 반복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김진후는 다시 한 번 체포되었고, 형벌을 못 이겨 배교하여 목숨은 건졌으나 유배형을 받았다. 얼마 후 유배형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지만 1805년 다시 체포되어 해미[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로 압송되었다. 그때부터 김진후는 형벌에도 불구하고 배교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였으며, 그 결과로 오랜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감옥 생활은 10여 년 동안 이어졌고 연로한 나이에 감옥 생활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1814년 12월 1일 해미의 옥에서 7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김진후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체스코 교황에 의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된 시복식(諡福式)에서 복자품에 올랐다.

② 김종한(金宗漢)[?~1816]

김진후의 셋째 아들로 천주교 세례명은 안드레아이고, 족보상 이름은 한현(漢鉉)이다. 내포 지역에 박해가 계속되자 김종한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로 이사하였다. 신자들과 교우촌을 이루고 살면서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배포하였고, 신자들에게 교리도 가르쳤다.

1815년 경상도 지역에 예기치 않은 박해가 일어나 김종한과 신자들은 함께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갔다. 배교하지 않자 대구로 이송되었는데 먼저 갇혀 있던 신자 중 배교하려는 이를 설득하는가 하면 함께 있는 신자들도 격려하였다. 김종한과 동료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1816년 12월 26일 대구 감영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김종한은 2014년 8월 16일 프란체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김제준(金濟俊)[1796~1839]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로 세례명은 이냐시오이다. 할아버지 김진후와 작은아버지 김종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장성한 후 고우르슬라와 결혼하여 1821년 김대건을 낳았다. 천주교 신앙으로 인해 집안이 박해를 받자 1827년 무렵 김제준은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 솔뫼를 떠났다. 처음에 서울 청파로 이사하였으며, 경기도 용인 한덕동[용인군 이동면 묵리]에 한동안 살다가 인근 골배 마실[용인군 내사면 남곡리]에 정착하였다. 골배 마실에 살고 있는 동안 1836년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신부가 입국하자 김제준은 서울로 찾아가 고해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해에 모방 신부는 골매 마실 근처 은이 교우촌을 방문하였는데 거기서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고, 김제준을 회장에 임명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한 배교자의 밀고로 회장인 김제준과 마을 신자들이 함께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던 중 김제준은 아들 김대건을 외국으로 유학 보냈다는 사실이 드러나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한때 형벌에 못 이겨 배교를 하였으나 다시 취소하고 신앙을 지켜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8명의 신자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김제준은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④ 김데레사[1779~1840]

김종한의 딸로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천주교 세례명은 데레사이다. 17살 때 신자인 손연욱[요셉]과 혼인하였으며 여러 자녀를 낳아 모두 신앙 교육을 시켰다. 1824년 남편이 해미에서 순교하자 몇몇 여성 신자들과 함께 살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전교 활동을 잘 하도록 도와주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었고 신앙을 굳건히 지키다가 1840년 1월 9일 서울 포청 옥에서 순교하였다. 김데레사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金大建)[1821~1846]

1821년 김대건이 아버지 김제준과 어머니 고 우르슬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솔뫼가 있는 내포 지역에 박해가 계속되자 김대건 집안은 솔뫼를 떠나 서울을 거쳐 경기도 용인 한덕동에 정착하였다. 김대건이 15살 때인 1836년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을 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마카오에서 김대건은 아시아 선교를 위해 프랑스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을 통해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고, 서양에 개방되어 있는 항구인 마카오에서 급변하는 세계를 눈으로 확인하며 성장하였다. 1844년 12월 10일경 김대건은 중국에서 최양업과 함께 신부가 되기 이전 단계인 부제품(副祭品)을 받았고,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연안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첫 사제가 되었다.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한 김대건은 선교사 영입을 위해 백령도 근처 순위도에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고 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김대건은 첫 한국인 사제로서,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로서 일찍부터 공경을 받았다. 그는 1925년 7월 5일 복자품을 받았으며, 1984년 5월 6일 성인품을 받을 때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 순교자로 이름을 올렸다.

[대표적 순례지 솔뫼 성지]

조선 후기부터 계속된 신앙의 역사로 말미암아 솔뫼는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늘 뜻 깊은 장소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19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솔뫼에 순교 기념비가 건립되었고, 해마다 7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축일이 되면 인근 성당 신자들이 정기적으로 순례를 가는 성지가 되었다. 1970년대 들어 천주교 대전교구에서는 솔뫼를 성지로 성역화하기로 하고 전담 신부를 파견하여 가꾸었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이하는 1984년을 전후하여 한국 천주교 역사가 크게 부각되자 솔뫼 성지는 더욱 주목을 받았다. 전국의 많은 신자들이 솔뫼로 순례를 올 뿐만 아니라 여름이 되면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도보 성지 순례의 출발점이 되었다.

2014년은 솔뫼 성지가 새로운 면모를 갖는 해가 되었다. 그해 한국 천주교회는 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를 개최했는데 솔뫼를 포함하는 내포 지역의 성지들을 중심으로 주요 행사가 이루어졌다. 8월 13일 아시아 청년 대회 개막식이 솔뫼 성지에서 있었고,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8월 15일 프란체스코 교황이 솔뫼를 방문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위상이 높아져 그해 9월 26일 솔뫼 성지는 ‘당진 솔뫼 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이라는 명칭으로 국가 지정 문화재 제529호로 지정되었다.

솔뫼 성지 구내에는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서 중국으로 항해할 때 이용한 ‘라파엘 호’를 상징하는 배 모양의 성당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그 안에는 매일 미사가 봉헌되는 성전과 김대건 신부의 기념관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성당 남서쪽에는 순례자들이 야외에서 미사와 모임을 할 수 있도록 아레나가 마련되어 있고, 그 북서쪽에는 김대건 신부의 옛 생가를 기와집으로 복원해 놓았다.

솔뫼를 상징하는 소나무 숲은 당진 9경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심에 1977년 건립된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있다. 그 곁에는 1946년 건립되어 솔뫼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물인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비가 소박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소나무 숲을 관통하여 마련된 십자가의 길과 대형 십자가, 그리고 한국의 전통 여인의 모습을 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상은 순례자들에게 중요한 기도처가 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9.19 오자 수정 [김대건 신부 집안과 순교자들]⑤김대건(金大建)[1821~1845]->⑤김대건(金大建)[1821~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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