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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003
영어공식명칭 Herbert Erich Wottawah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41년 2월 1일연표보기 - 허창수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962년 9월 1일 - 허창수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사제 서품
활동 시기/일시 1972년 10월 16일 - 허창수 한국으로 선교 파견
활동 시기/일시 1985년~1991년 - 허창수 대구가톨릭신학원 원장
활동 시기/일시 1985년 9월 5일~2009년 8월 26일 - 허창수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소장
몰년 시기/일시 2009년 8월 26일연표보기 - 허창수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9년 9월 1일 - 허창수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장례미사
출생지 체코 - 체코 자이펜
학교|수학지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토 선교수도회 -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
활동지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 대구광역시
활동지 구미노동사목연구소 - 경상북도 구미시
성격 사제
성별 남성
대표 경력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장

[정의]

대구에 있었던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장을 역임한 가톨릭 사제.

[개설]

허창수[1941~2009]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2월 1일 독일에 점령된 체코의 자이펜에서 태어났다. 허창수 신부의 원래 이름은 헤르베르트 에리히 보타바(Herbert Erich Wottawah)이다. 독일이 전쟁에서 패하자 허창수 신부의 가족은 독일 남부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허창수 신부는 독일 바이에른주의 뮌헨 근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김나지움을 다니면서 성 베네딕트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과 인연을 맺었다. 허창수 신부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1968년 9월 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활동 사항]

허창수 신부가 독일을 떠나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은 유신헌법이 공포되기 하루 전인 1972년 10월 16일이었다. 허창수 신부는 거리의 탱크 모습 등 한국의 첫인상에 충격을 받았다. 한국의 군사독재를 겪으면서 성직자가 교회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인권과 민주화도 종교인의 사명임을 피부로 느꼈다. 1975년 국제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에 가입하여 유신정권에 맞서 인권운동에 헌신하였다.

허창수 신부는 1974년 8월 성주 본당 보좌신부 소임을 맡았으며, 1975년 4월 가천성당 주임[임시], 1976년 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 지도 신부, 1976년 8월 대구가톨릭신학원 강사, 1979년 1월 1일부터 1985년 9월 14일까지 구미 인동성당 주임, 1985년부터 1991년까지 대구가톨릭신학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허창수 신부는 노동자의 인권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았는데 1985년 9월 5일 구미노동사목연구소[현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2대 소장으로 부임하여 구미 공단 노동조합 설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 2009년 8월 26일까지 구미노동사목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허창수 신부는 한국에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허창수’라는 한국식 이름을 가졌다. 한국 민주화운동이 대구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될 때 대구가톨릭신학원은 민주화운동 집단의 회의 장소, 강연회 장소,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양심수로 구속되자 1991년부터 2002년 3월까지 10년간 국제앰네스티의 한국지부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한국지부는 대구에 있었다.

허창수 신부는 오랫동안 파킨슨병을 앓았으며 2009년 8월 26일 독일에서 사망하였다. 9월 1일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허창수 신부의 장례미사를 지냈다.

[묘소]

허창수 신부의 묘소는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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