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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690
한자 長老敎
영어공식명칭 Presbyterian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희

[정의]

대구광역시 지역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신교의 한 교파.

[개설]

장로교는 17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 원리가 아니라, 이미 사도적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역사적인 정치 원리이다. 장로교는 유럽 대륙에서 루터에 의하여 시작된 개혁 사상과 특히 제네바의 칼뱅 및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존 낙스 등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 장로교는 ‘미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시스 매케미(Francis Makemie)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매케미는 1706년 12월 26일 뉴저지주에서 미국 최초로 필라델피아 노회를 조직하였다. 171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최초의 대회가 열렸다. 1789년 5월 21일 필라델피아 제2교회에서 미국 최초의 장로교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교단의 명칭은 ‘미국장로교회’라 칭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였다.

미국장로교회는 1845년 노예해방 문제로 남장로교회와 북장로교회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노예 문제로 시작된 남북전쟁으로 인하여 미국인의 도덕적, 영적 생활이 위기를 맞았으나, 무디(D. L. Moody)의 부흥 운동으로 그 상처들이 아물게 되었다. 1886년 헬몬산 산정의 하기 학생 사경회에서 프린스톤 서약[Princeton Charter]에 서명하고 해외선교에 지원한 학생들이 여학생 500명을 포함하여 2,106명이나 되었다. 여기서 배출된 선교사들 중에는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에 영향을 미친 게일(J. S. Gale)과 존 모트(John R. Mott)가 있다. 이들 외에도 미국에서 파송된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무디 부흥 운동’에서 은혜를 체험한 선교사들이었다.

[한국 장로교]

한국 장로교는 한미 수교 이전인 1866년(고종 3) 9월에 셔먼호에 승선한 영국의 런던선교회 소속 장로교 선교사 토머스(Robert J. Thomas)가 대동강까지 올라와 한문으로 된 성경을 나누어주고 순교하였던 데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중국 만주 지방에서 선교하던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의 전도를 받은 서상륜(徐相崙)이 1883년에 복음서들을 몰래 국내로 가지고 들어와 고향 황해도 솔내[松川]에서 여러 사람에게 배포하고, 전도하였다. 1884년 11월 황해도 솔내에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가 들어섰다.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교의 의료 선교사로 파송된 알렌이 왕실의 신임을 얻어 1885년 4월 광혜원을 개원하였다. 이와 더불어 1885년 4월 부활절에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 언더우드가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장로교의 한국 선교는 막을 올리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1887년 7월 11일 자택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개종자 1명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1888년 캐나다 장로교 소속 게일(James Scarth Gale) 선교사가 입국하고, 이어서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외국선교위원회에서 파견한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s)와 데이비스의 누이동생 메리가 1889년에 입국하였다. 1892년 2월에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소속 테이트(Lewis Boyd Tate),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 등 7명의 선교사가 입국하여 선교를 시작하였다.

한국 선교를 시작한 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등의 장로교 선교회는 1893년 1월 28일 장로교선교회협의회를 조직하여 한국에서 단일 장로교회를 세울 것을 결정하고, 선교활동의 모든 문제를 협의하기로 하며 선교 구역을 분할하였다. 그 결과 1907년 9월 17일 비로소 노회 하나를 조직하였는데, 이를 ‘독로회(獨老會)’라 불렀다. 그 뒤 각 도 내에 노회가 계속 조직되어 1912년 9월 1일에는 평양여자성경학교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신학적인 문제, 신사참배 문제, 교회 일치 문제로 장로교는 분열하고 말았다.

[대구 지역의 장로교]

대구 지역의 장로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베어드 선교사 이후 1897년 11월 1일 아담스(James E. Adams) 선교사, 브루엔(Henry M. Bruen) 선교사, 존스(Woodbridge O. Johnson) 의료 선교사가 선교지부를 설치하면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특히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이후 급성장함에 따라 동쪽으로는 사월교회[1908], 범어교회[1912], 효목교회[1915], 중부교회[1931]를 분립하고, 서쪽으로는 월배교회[1907년], 성서제일교회[1909], 서문교회[1912], 감산교회[1916], 중앙교회[1924]를 분립시켰다. 남쪽으로는 남산교회[1914]를 분립하고, 북쪽으로는 무등교회[1909], 침산교회[1909], 산격제일교회[1920], 칠성교회[1921] 등으로 분립시켰다. 이후에 한국장로교회는 신사참배 처리 문제, 자유주의 신학과의 대립,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입장 차이로 세 차례나 분열되었다. 1951년에는 ‘고신’ 교단이 분립하고, 1953년에는 ‘기장’ 교단이 분립하였으며, 1979년에는 ‘통합’ 교단이 분립되었다. 이런 크고 작은 분열과 함께 대구 지역의 장로교회도 분열하여, 합동 487개 교회, 통합 362개 교회, 고신 116개 교회, 호헌 45개 교회, 합신 23개 교회, 백석 24개 교회, 대신 3개 교회, 재건 3개 교회, 합동보수 3개 교회 등으로 나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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