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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517
한자 監理敎
영어공식명칭 Methodist Church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희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의 한 교파.

[개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영국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이다. 영국국교회 목사였던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의 교구에서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고 사역한 후 1729년 옥스퍼드로 돌아와 신성회[Holy Club]를 지도하였다. 웨슬리는 아메리카 식민지 조지아로 건너가 2년 동안 선교를 하였지만 실패하고 1738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에서 웨슬리는 아메리카로 건너갈 때 만났던 모라비아 교도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1738년 5월 24일, 모라비아파의 수양회에 참석하였다가 복음적 회심을 경험하였다. 1738년 여름에 작센의 진젠돌프를 방문하였는데 모라비아 교도들의 독선적인 모습과 진센돌프에 대한 과도한 숭상에 실망하여 모라비아 교도들과 결별하고 스스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웨슬리는 1738년 이후 1751년까지 영국에서 순회 전도를 25만 마일 이상 다녔으며 42,400번의 설교를 하였다. 웨슬리는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치며 영국의 각 지방을 순회하여 설교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부흥 운동을 주도하면서 웨슬리는 영국국교회의 형식주의와 위선을 비판하였고, 영국국교회는 웨슬리의 부흥 운동을 열광주의자, 광신자라고 비판하며 설교를 방해하였다. 찰스 스투얼이 영국 왕위에 오르자 박해는 점점 더 심하였다. 웨슬리가 인도하는 ‘속회’와 ‘야간 집회’를 교황권 운동이나 왕권 회복 운동으로 오인하여, 교구 목사들과 지주들이 폭도를 매수하여 집회를 방해하였다. 심지어 성례전도 영국국교회의 이름으로 집례할 수 없게 되었다.

1739년 웨슬리는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와 함께 런던과 브리스톨에서 수십 개의 감리교 신도회를 조직하였으며, 1743년에는 500명의 신도회 회원들이 활동하였다. 웨슬리는 신도회 조직들을 기초로 1744년 8월 25일 4일간 교역자 회의를 가짐으로써 독자적인 교단을 설립하였고, 신앙 25개 조를 채택하여 연합 신도회를 구성하였다. 연합 신도회는 감리교의 기초가 되었다.

미국에서 감리교는 1766년부터 시작되었다. 1769년 웨슬리는 미국에 순회 전도사를 파견하였다. 1771년 미국에 목사가 없어 웨슬리는 프랜시스 애즈버리(Francis Asbury)를 목사로 안수하여 최초로 미국에 파견하였고, 리처드 와트코트(Richard Whatcoat), 토머스 베시(Thomas Vasey)를 장로로 파송하였다. 1773년 미국 최초로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연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1773년에 볼티모어의 ‘성탄 연회’에서 ‘감리교 감독교회’로 독립 출범하게 되었다. 1784년 12월 24일에 볼티모어에서 열린 ‘성탄 의회’에서 웨슬리의 제안으로 ‘감리교 감독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가 자치권을 지닌 교단으로 설립되었다.

[한국 선교]

한국 감리교의 선교는 1884년 6월 27일 미국 감리교에서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개화파의 지도자인 김옥균(金玉均)을 통하여, 1884년 7월 3일 고종에게 감리교회의 선교사업에 대한 윤허를 요청하였고, 고종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 국한시켜 선교사업을 허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1885년 4월 5일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부부는 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와 함께 인천에 상륙하여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885년 5월 감리교의 의료 선교사인 스크랜턴(Scranton, W. B.)이 서울에 도착하였고, 아펜젤러는 정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1885년 8월 3일부터 한국인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배재학당이 시작되었다. 9월 10일부터 스크랜턴은 정동 자신의 집에서 환자들을 치료함으로써 정동감리교병원이 시작되었다.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은 1886년 5월 30일 한국인 여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이화학당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감리교는 선교사들에 의하여 근대교육과 의료사업을 전개함으로써 민중의 마음을 열고, 한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1901년에는 김창식(金昌植)과 김기범(金箕範)이 선교연회[Mission Conference]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교세는 급성장하여 1901년에는 전국을 세 지방으로 분할, 관장하였다. 1904년에는 조선선교연회[Korea Mission Conference]가 조직되고, 1908년에는 조선연회[Korea Conference]가 조직되어 중국연회에서 완전히 독립된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1905년 9월 11일, 장로교의 4개 선교부, 감리교의 2개 선교부가 이화여학교 예배실에서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창립하였다.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는 단순한 선교사 협의 기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된 개신교회’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방하였다. 이전에 이미 장로교감리교 사이에 연합활동이 시작되었고, 1892년 미감리회와 장로회 사이에 ‘교계예양(敎界禮讓)’으로 선교지 분할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여러 번의 조정 과정을 거쳐 1909년에 미감리회 선교 지역은 경기도, 충청북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장로회 선교 지역은 경기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함경남도 등의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대구 지역의 선교]

대구 지역에서 감리교 전도는 해방 이후인 1948년 1월 15일 중구 향촌동 51번지에서 윤삼효 목사가 대구제일감리교회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67년 3월 2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모였던 제10회 특별 총회에서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제주도, 부산광역시를 일원으로 선교연회를 창설하기로 하였다. 1967년 3월 29일 제1회 삼남선교회를 회집하고 정식으로 선교연회를 조직하였다. 1980년 5월 28일~30일 제13회 제2차 특별 총회에서 삼남선교연회를 삼남연회로 독립시키고 삼남연회를 부산서, 부산동, 대구, 마산, 경북동, 이리, 전주, 진주, 전남, 제주, 울진 등 지방으로 조직하였다.

현재 대구광역시에는 감리교 대구지방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남문감리교회를 비롯하여 평강감리교회, 서대구감리교회, 대구중앙감리교회, 기둥감리교회, 행복한 감리교회, 대구제일감리교회, 대구감리교회, 은평감리교회, 송현감리교회, 북대구감리교회 등 35개 교회가 성장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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