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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435
한자 樂齋先生文集
영어공식명칭 Nakjae seonsaeng munjip
이칭/별칭 『낙재집(樂齋集)』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616년연표보기 - 『낙재선생문집』 초간본 편찬
간행 시기/일시 1843년 - 『낙재선생문집』 중간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소장처 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 - 대구광역시 북구 대학로 80[복현동 573]지도보기
성격 문집
저자 서사원
간행자 서택렬
권책 4책[원집 7권|연보 3권|부록]
행자 10행 20자
규격 21.0×16.4㎝
어미 상이엽화문(上二葉花紋)
권수제 낙재선생문집(樂齋先生文集)
판심제 낙재선생문집(樂齋先生文集)

[정의]

1843년에 간행된 조선 후기 대구 출신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서사원의 개인 문집.

[저자]

서사원(徐思遠)[1550~1615]의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樂齋) 또는 미락재(彌樂齋)이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1529~1584]의 문하에 입문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 출입하며 성리의 학문을 추구하였다. 임진왜란에는 의병장으로 활동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대구 지역의 유학을 재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관직은 청안현감(淸安縣監)을 지낸 것이 전부이고, 이후 조정의 부름에도 출사하지 않고 경서(經書)를 강해(講解)하며 성리학에 침잠하였다. 고향 하빈(河濱)에 미락재(彌樂齋)를 짓고 학문적 삶을 추구하다가 1615년(광해군 7) 4월에 노병으로 죽었다.

[편찬/간행 경위]

『낙재선생문집(樂齋先生文集)』서사원이 사망한 이듬해인 1616년 문인과 사우들이 강학 장소였던 선사재(仙査齋)[현재 대구광역시 달서구 파호동 46-1 이락서당 자리]에 모여 유고(遺稿)를 수집하고 주고 받은 서찰을 모아 편찬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이후 후손 서택렬(徐宅烈)[1784~1857]이 다시 흩어져 있는 시문을 수집하고,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이 지은 서사원의 「행록(行錄)」과 박종우(朴宗祐)[1587~1654]의 「이강서원묘우상량문(伊江書院廟宇上樑文)」 등을 증보 재편하여 1843년에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낙재선생문집』은 4책[원집(原集) 7권, 연보(年譜) 3권, 부록(附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판본이다. 크기는 가로 21.0㎝, 세로 16.4㎝며, 10행 20자로 상이엽화문어미(上二葉花紋魚尾)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4696], 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낙재선생문집』은 원집 7권, 연보 3권, 부록으로 모두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 박광석(朴光錫)과 서인순(徐麟淳)의 중간본 서문과 목록이 있다. 제1권은 시 133수로 구성되어 있고, 제2권은 102수의 시와 4편의 부(賦)를 싣고 있다. 권3~4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부터 주고받은 74편의 서신들이 편제되어 있다. 제5권은 묘갈(墓碣), 비문(碑文), 제문(祭文), 축문(祝文)이 실려 있다. 제6~7권은 잡저(雜著)로 「공부차록(工夫箚錄)」, 「학교규범(學校模範)」, 「초집향병문(招集鄕兵文)」, 「승차걸속문(承差乞粟文)」, 「동사일록(東槎日錄)」, 「수청안시천인제목(守淸安時薦人題目)」이 수록되어 있다. 『연보』는 3권으로 구성되어 문인과 사우의 기록, 제자들의 추모글이 담겨 있다. 「부록」에는 정구(鄭逑), 김우옹(金宇顒), 이호민(李好閔), 정경세(鄭經世), 한준겸(韓浚謙) 등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낙재선생문집』은 17세기 대구 유학 진흥을 추적할 수 있는 문헌 자료이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 활동과 재지 사족들의 교유를 기록한 증언으로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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