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대구노동친목회 파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269
한자 大邱勞動親睦會 罷業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6년 1월 26일연표보기 - 대구노동친목회 파업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26년연표보기 - 대구노동친목회 파업 종결
성격 노동운동|노동쟁의

[정의]

1926년 대구노동친목회가 임금 인하를 단행한 진목운송점을 상대로 일으킨 노동쟁의.

[개설]

운수 노동자 친목계는 1923년 7월 설립되었다. 신재모, 김광서, 김학삼, 서병하, 김성곤, 장춘동 6명이 주축이 되어 운수 노동자 30여 명을 규합하여 설립하였다. 대구역은 대구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곳이자, 각종 물산이 유통되는 집산지였다. 따라서 물건을 나르는 일용직 날품팔이 육체노동자가 밀집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구노동공제회 회원 신재모대구역 운수 노동자를 대상으로 노동단체를 결성하려고 하였다. 초창기에는 단체의 이름처럼 주로 친목계에 머물렀다. 대구노동공제회의 직업별 노동단체 설립에 영향을 받았다.

대구역 화물 운반 노동자 400여 명은 1925년 10월 23일 오후 1시 만경관에서 창립총회를 열어 친목계의 명칭을 ‘대구노동친목회(大邱勞動親睦會)’로 변경하고, 회장에 서병하(徐丙夏)를 선출하였다. 대구노동친목회는 지위 향상, 생활 안정, 상호부조 등을 목적으로 만들었다. 1925년 7월 24일 시장정 대구노동친목회관 2층에서 위원회를 개최하여, 회장 김광서, 부회장 김학삼, 당무 이덕우 외 3명, 서무부 권영규 외 25명, 구제부 임수복 외 39명, 교육부 김문학 외 1이명, 회계부 강치운 외 2명, 경호부 장춘옥 외 4명을 선출하였다. 대구시 운반업에 종사하는 노동단체 회원 1,500여 명이 소속된 대구노동친목회는 “단순한 친목회만이 아닌 이상, 회명을 고칠 필요가 있다”라고 합의하여, 1927년 5월 29일 총회를 열어 6월 1일부터 대구노동회로 회명을 변경하였다.

[역사적 배경]

대구노동친목회는 운반업에 종사하는 육체노동자의 임금 안정을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다. 당시 대구역 운반 육체노동자의 운임은 운송점마다 서로 다르고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대구 노동친목계’에서 ‘대구노동친목회’로 회명을 바꾼 뒤 가장 먼저, 운송점마다 서로 다른 운임을 최고율로 단일화시키고자 하였다. 대구노동친목회는 1926년 1월에 열린 정기총회에서도 운임을 최고율로 통일하자는 결의 사항을 채택하고, 이를 각 운송점 단체인 운송조합에 전달하였다.

[경과]

1926년 1월 26일 무렵 대구역 일본인이 운영하는 진목운송점이 종래 한 차 운임비 3원 60전에서 60전을 내린 3원으로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진목조합에서 일하던 대구노동친목회 회원 10여 명이 원래의 임금 지불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하였다. 진목운송점은 대구노동친목회 회원이 아닌 대체인력을 확보하여 영업을 계속하였다. 파업 중 대구노동친목회 회원과 새로 고용된 노동자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진목운송점 파업을 지켜보던 대구경찰서대구노동친목회 회원 강천이 외 여러 명을 구속하였다. 진목운송점에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명목이었다. 대구경찰서는 다른 한편으로 진목운송점과 노동자 양측 대표를 불러, 진목운송점 파업의 중재를 시도하였다. 진목운송점 입장에서는 하루 입고되는 차량이 다섯 대 이상이면 원래대로 임금을 지불하고, 그 이하면 인하된 임금을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노동자 측은 실제 하루 입고 차량이 다섯 대를 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운송점의 수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결과]

대구경찰서는 진목운송점의 임금 인하 조치를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수용하기를 강요하였다. 임금 인하 조치를 수용하지 않으면 대구노동친목회를 해산시키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대구경찰서의 강압적이고 무리한 중재는 오히려 파업 노동자들의 불신을 높였다. 결국 대구경찰서의 중재는 실패로 끝났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