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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노동친목회 동맹파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267
한자 大邱勞動親睦會 同盟罷業
영어공식명칭 Strike of Daegu Labor Friendship Association.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25년 8월 2일 - 대구노동친목회 운송점조합과 대구상업회의소에 진정서 제출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5년 9월 15일연표보기 - 대구노동친목회 동맹파업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25년 10월 10일 - 대구노동친목회 동맹파업 발생
성격 노동운동|노동쟁의
관련 인물/단체 신재모|서병하|대구노동공제회

[정의]

1925년 9월 15일 대구노동친목회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일으킨 노동쟁의.

[대구노동친목회]

대구운수노동자친목계는 1923년 7월경 설립되었다. 신재모·김광서·김학삼·서병하·김성곤·장춘동 등 6명이 주축이 되어 운수 노동자 30여 명을 규합하여 설립하였다. 대구역은 대구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곳이자, 각종 문물이 모여드는 집산지였다. 따라서 물건을 나르는 일용직 날품팔이 육체노동자가 밀집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구노동공제회 회원 신재모(申宰模)는 이런 대구역 운수 노동자를 대상으로 노동단체를 결성하려 하였다. 초창기에는 단체의 이름처럼 주로 친목계에 머물렀다.

대구역 화물 운반 노동자 400여 명은 1925년 10월 23일 오후 1시 만경관에서 창립총회를 열어 친목계의 명칭을 ‘대구노동친목회(大邱勞動親睦會)’로 변경하고, 대구노동친목회 회장으로 서병하(徐丙夏)를 선출하였다. 대구노동친목회는 주로 지위 향상, 생활 안정, 상호 부조 등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대구노동친목회에서는 1925년 7월 24일 시장정 대구노동친목회관 2층에서 위원회를 개최하여 회장 김광서, 부회장 김학삼, 당무 이덕우 외 3인, 서무부 권영규 외 25인, 구제부 임수복 외 39인, 교육부 김문학 외 1인, 회계부 강치운 외 2인, 경호부 장춘옥 외 4인을 뽑았다. 운수 노동자 1,500여 명이 소속된 대구노동친목회는 “단순한 친목회만이 아닌 이상 회명을 고칠 필요가 있다”며 1927년 5월 29일 총회를 열고 6월 1일부터 대구노동회로 변경하였다.

[경과]

1925년 9월 15일 대구에서 각 운송점 화물을 운반하는 대구노동친목회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총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 대구역에서 화물을 내려 시내로 운반하는 임금이 1918년이나 1919년에 비하여 1/3 또는 절반 이상 인하된 상황이었다. 임금이 너무 줄어들어 생활이 어려워지자 대구노동친목회 회원들은 임금 인상을 하고자 1925년 8월 2일 운송점조합과 대구상업회의소에 진정서를 내고 8월 27일까지 답변을 요청하였다. 제1차 답변에 대하여 두 단체 모두 응답하지 않자, 재차 1925년 9월 15일까지 답변을 요청하였다. 대구상업회의소는 “운송 노동자의 파업이 자기 관할이 아니라 관여할 수 없다”라고 통보하였다. 운송점조합은 재연기된 1925년 9월 15일까지도 입장을 표시하지 않았다. 운송점조합이 운송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결국, 운수 노동자와 운송점조합의 임금 인상 협상이 결렬되었다. 이에 따라 1925년 9월 15일 대구노동친목회 회원들은 동맹파업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대구경찰서는 서장 이하 고등계원, 경찰부 보안과장 등이 총출동하여 대구노동친목회 간부들과 운송점조합 간부를 불러 타협을 요구하였고, 1925년 9월 말까지 임금 인상 문제에 대한 타협을 보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운송점조합으로부터 임금을 2할 5부[25%] 올려주겠다는 화답을 받고 파업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운송조합이 임금 인상을 지키지 않자, 대구노동친목회는 1925년 10월 10일부터 다시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노동친목회[대구노동회] 중심으로 1920년대 대구 지역 노동운동의 전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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