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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870
한자 李善長
영어공식명칭 Lee Seonja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3년 10월 12일연표보기 - 이선장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이선장 신간회 대구지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이선장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1월 - 이선장 일제를 비난하는 격문 살포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이선장 대구노동회 비리 폭로
활동 시기/일시 1944년 - 이선장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6년 9월 - 이선장 대구 총파업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6년 10월 - 이선장 10월항쟁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85년연표보기 - 이선장 사망
출생지 진량면 - 경상북도 경산군 진량면
거주|이주지 대구광역시 - 대구광역시
학교|수학지 도시샤대학 - 일본 도쿄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언론인|사회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경상북도인민위원회 산업부장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

[개설]

이선장(李善長)[1903~1985]는 1903년 10월 12일 지금이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에서 태어났다. 신간회 대구지회에 가입하고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 결성에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이선장은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유학하였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대구로 돌아와서 장인환이 운영하던 『현대평론(現代評論)』 대구지사에 들어가 언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7년 신간회 대구지회에 가입하였다.

1929년 이선장은 조선일보사 대구지국의 기자가 되었다. 이 무렵 경산을 포함한 경상북도에 병충해가 발생하여 농작물 수확이 격감하였는데도 지주들이 계속 무리하게 소작료를 거두자 경산 진량의 농민들은 소작료불납동맹을 결성하고 저항하였다. 이선장은 그러한 사정을 『조선일보』에 상세히 보도하여 소작농들의 생활 안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이활(李活)[이육사]·남만희 등과 함께 침체기였던 대구청년동맹을 다시 일으키려는 활동을 벌였다. 이선장은 1930년 11월 이활 등과 함께 일제를 비난하는 격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31년에 신간회가 해소되고 조선청년총동맹이 해체되자 이선장은 경상북도 각 지역 언론인 출신 운동가들과 함께 ‘보조협조망’을 결성하여 연락망을 구축하고 정세를 교환하였다. 또한 대구 지역 언론인들과 함께 친목단체인 칠조회(七鳥會)를 결성하였고, 1931년 대구노동회의 비리를 폭로하여 대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구노동회대구역에서 화물을 부역하는 인부 등으로 구성된 노동자들의 친목 단체였는데, 대구노동회 회장 김광서(金光瑞)가 노동자들의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한다는 명목으로 회원들의 하루 품삯에서 3전씩을 떼어 유용하였던 것이다. 김광서는 부정을 은폐하기 위하여 경찰에게 뇌물을 주어 무마하였다. 이선장은 대구의 노동운동가 정운해, 목사 최문식(崔文植) 등과 협의한 후 자신과 가까웠던 김종수(金鍾洙)를 대구노동회에 위장 가입시켜 그 사실을 확인케 하였다. 그 뒤 이종수는 김광서가 회비를 유용한 장부를 경찰에 제시함으로써 대구노동회 회장과 서기가 구속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일제 경찰은 최문식과 이종수가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는 죄명을 씌어 검거하였다. 이 사건이 이른바 ‘대구적색노동조합사건’이었다. 이선장은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하여 원산으로 피신하였다가 6개월 만에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1944년 말 이선장은 서울에서 여운형(呂運亨)·안재홍(安在鴻) 등과 만나 광복을 준비하기 위한 비밀결사 결성을 논의하였고, 대구에서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를 결성하여 건국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대구지부 결성에 참여하였고,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확대 개편되자 경상북도인민위원회의 산업부장이 되었다. 1946년 3월 5일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도위원회 결성대회에서 성원 자격 심사 보고를 하였고, 6월에는 대구의 좌우합작위원회로 불린 대구공동위원회조선공산당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9월 4일 경상북도 공보과 회의실에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처벌을 위하여 개최된 대구공동위원회의 8인 조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선장9월 총파업에 이은 10월항쟁에 연루되어 제5관구경찰청에서 장기간 조사를 받았고, 1947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대구시위원회 관계자들과 함께 ‘혐의 없음’으로 석방되었다. 이선장한국전쟁 이후 대구 약전골목에서 일선당한약방을 운영하다가 1985년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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