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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임업사무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347
한자 大邱林業事務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7년 3월연표보기 - 대구임업사무소 설치
해체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대구임업사무소 폐지
성격 산림기술센터

[정의]

1907년 4월 대구광역시에 설치된 임업 관련 기관.

[설립 목적]

대한제국 정부는 1905년 전국에 걸쳐 산림조사를 하였다. 산림 정비가 완료되면 자연스럽게 하천 정비가 이루어지고, 도로 개보수와 광업·수산업의 발달이 쉬워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6년 일본의 산림 전문가를 초빙하여 임업 관련 업무를 맡겼다. 1907년에는 수원, 평양, 대구 3곳에 수묘양성소(樹苗養成所)를 설치하였고 모판 파종, 양묘(養苗), 식림(植林)을 실시하였다.

당시 경상북도의 산림면적은 130여 만 정보로 한반도 임업 총면적의 8%를 차지하였고, 전국 5위였다. 당시 대부분 작은 나무들이 주로 자라고 있었고, 토질은 식림을 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따라서 수원, 평양과 함께 대구에 임업사무소가 설치되었다.

[변천]

대구임업사무소(大邱林業事務所)는 1907년 3월 농상공부 직할로 대구부 동운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동쪽에 설치되었다. 당시 대구임업사무소 소장은 모리다[守田六男]였다. 모리다는 일본 각지에서 가져온 종묘를 조선의 자연환경에 맞게 이식하는 실험을 주로 하였다. 1910년 강제병합되면서 대구임업사무소는 폐지되고, 경상북도중앙묘포(慶尙北道中央苗圃)가 신설되었다. 사업 범위도 넓어져 대구뿐 아니라 의성, 안동, 봉화, 상주, 경주 등 5개 지역에 묘포가 설치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임업사무소에서는 산림 수목과 모판 묘목의 양성, 산야 조사 등을 주로 하였다.

산림 수목 양성을 위해 1908년 99만㎡에 적송 17만 2800그루, 상수리나무 25만 9200그루를 조림하였다. 1909년에는 조림지를 추가하여 두 군데에서 실험하였다. 우선 조림 면적 29만 7000㎡에는 적송 4,400그루, 상수리나무 4만 4000그루, 아카시아 1,000그루, 물오리나무 1,000그루, 밤나무 150그루, 흑송 4만 9450그루를 심었다. 또한 비슬산 일대 19만 8000㎡에는 상수리나무 종류 6섬을 심었다.

모판 묘목 양성을 위해 1907년 대구부 동운정 일대 8만 5800㎡ 규모의 모판에서 일본에서 가져온 임업 자원을 약 3년 동안 길러 내었다. 이때 성공한 종묘는 농상공부로 보내졌다. 1909년에는 적송·흑송·상수리나무·아카시아·느티나무·개암나무 등 24종, 갯버들 2만 그루, 백양나무 500그루, 못자리 이식 87만 6000그루 등 총 58석 9두를 파종하였다. 조림 후 고사 비율은 첫해 약 10%, 2년간 약 15%였다. 2년~3년간 실험 결과 임시 적합 종은 적송·흑송·상수리나무·아카시아·갯버들·백양나무 등 6종이었다. 2~3년간 실험 결과 부적합 종은 삼나무·전나무·낙엽송이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임업사무소는 전국에서 최초로 조성된 임업 시험장이며, 근대 시기 조림(造林) 및 육림(育林)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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