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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장에 가는 사람들, 대구 시장 투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48
한자 -場-, 大邱 市場-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주연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전통을 이어 온 주요 재래시장.

[개설]

소상공인진흥공단에서 대구광역시의 전통시장을 찾아보면 130여 곳이 검색된다. 동네 어귀마다 있는 작은 시장부터 명절 대목장을 보러 가는 대형 재래시장까지 모두 나열되어 있는데 대구광역시에는 특히 오랜 세월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재래시장이 많은 편이다.

[상업도시 대구]

금호강낙동강이 교차하는 대구는 나룻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던 시대부터 큰 장이 서곤 하였다. 지정학적 조건에 의하여 상업이 발달한 덕분에 대구는 재래시장 또한 어느 도시보다도 활성화되어 있으며, 역사 또한 오래되었다. 물건의 교류와 더불어 정보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시장은 대구의 발전과 함께 전개되었다.

2000년대 들어 대형마트나 기업형 슈퍼마켓이 대세를 이루면서 전통시장은 쇠퇴의 기로에 선다. 이에 따라 2004년에는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지는데 전통시장도 시설 현대화를 추진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전통시장이 나름의 콘텐츠를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에 따라 2010년에는 문화관광형 시장 육성 추진 계획이 시행되었으며, 2013년에는 전통시장 상인 등 소상공인의 경영 안정을 꾀하는 「소기업 및 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개정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대구광역시의 전통시장에는 아케이드, 주차장, 진입로 등이 설치되었으며 상인과 소비자의 만남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노력이 가세하였다. 특히 온누리상품권의 보급으로 ‘전통시장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온누리상품권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기금에서 비용을 부담하여 판매하는 상품권이다. 대구광역시의 공공기관에서는 우선적으로 구매하여 재래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대구 전통시장 활성화 포럼’을 개최하여 대구광역시의 경제 활성화는 전통시장에서 시작함을 강조하고 있다. 대구광역시와 대구전통시장진흥재단이 공동 개최하는 ‘대구 전통시장 활성화 포럼’에서는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생각들을 공유하며, 소상공인들의 성공 사례들을 살펴봄으로써 전통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운영 방식을 안내한다. 또한 청년 창업, 골목상권 등에 주목하며 전통시장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대구광역시의 재래시장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쳐야 하였으며 쉽게 사라지지 않는 사연들을 품게 되었다. 따라서 대구광역시의 전통시장들이 지닌 각각의 특색 있는 이야기를 알아야 시장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서문시장]

서문시장은 대구광역시 중구에 있다. 서문시장으로 가는 길목마다 큰장로라는 주소가 보이며 실제로 대구 시민들은 서문시장에 갈 때 큰 장에 간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커다란 장터를 의미하는데, 서문시장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를 대표하는 시장인 서문시장제1지구, 제2지구, 제4지구, 동산상가, 건해산물상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구역과도 가까워 타 도시에서 접근이 편리하다. 조선시대 때부터 한양과 부산을 잇던 서문시장이 현재까지도 여러 도시를 잇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대구도시철도 3호선서문시장역에 정차하여 대중교통을 통한 접근성이 우수하다.

뿐만 아니라 서문시장은 낮에는 큰시장, 밤에는 야시장을 통한 먹거리 상품화가 인기리에 성행하고 있으며 인근에 구축된 근대골목투어와 더불어 관광자원도 충분히 유입되고 있다. 서문시장 안의 모든 통로에는 아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어 날씨와 상관없이 이용할 수 있으며 먹거리를 파는 노점이 유독 많은 것이 특징이다.

[칠성시장]

칠성시장서문시장과 함께 대구를 대표하는 시장이다. 시장 면적으로는 대구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1가 일대의 재래시장인 칠성시장은 각 농가의 농산물이 총집결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칠성시장은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일제강점기 신천 북쪽에 자리 잡은 작은 난전일 때는 과일, 채소를 주로 거래하던 소규모 시장에 불과하였다. 그러다 동촌 및 하양 등지의 사과와 농산물이 집결하여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동천시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6년부터는 시장 공영화 시책에 따라 ‘북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상설화되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다른 시장을 거느리지 않고 단일한 규모였는데 1970~1980년대에 이르러 북문시장을 중심으로 상가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삼성시장, 청과시장, 경명시장이라는 이름의 건물들이 들어섰고 자연히 가구시장도 형성되었다. 또한 푸른다리 인근에 밀집하여 있던 전자상가와 주방상가들이 신천대로 건설로 밀려나 칠성시장으로 유입되기도 하였다.

칠성시장 내에는 꽃 도매시장, 가구시장, 전자상가, 문구골목, 철물시장, 김밥골목, 닭골목, 돼지족발골목 튀밥골목 등이 특화되어 있으며, 의류나 원단의 경우 서문시장에 양보하는 듯 수효가 적은 편이다. 대신 청과물이나 농수산물을 도매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청과물시장이 유명하다. 또한 수산물 등 식자재에 관한 것이라면 총망라되어 있기에 식당 업자들은 물론이고 대구 전역에 걸쳐 주민들이 찾아올 정도이다.

2019년 11월 1일 신천대로 교각 앞의 신천 둔치에 야시장이 개장하여 칠성시장을 찾는 대구 시민들의 발길은 더욱 잦아졌다. 대구도시철도 1호선 칠성시장역 1번 출구로 올라와 칠성시장에 들어서면 곧장 시장 풍경이 펼쳐진다. 다양한 시장이 모여 대규모 종합시장을 이루고 있는 칠성시장은 입구에 따라 다채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칠성시장은 갈 때마다 다른 시장처럼 느껴지는 생동감이 있다. 다음 골목에는 다른 시장이 펼쳐지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다른 장이 서 있는 셈이다. 웬만큼 칠성시장을 많이 다녀 본 칠성시장 고수가 아니고는 ‘칠성시장 지도’를 봐도 각각의 시장 위치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각 시장의 풍경이 서로 비슷하지도 않다. 채소를 팔던 시장에서 길만 건너면 돼지고기의 누린내가 진하게 밴 골목이 나오고 그 골목 바로 옆에는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나는 시장이 나온다. 이렇듯 칠성시장은 시장마다 취급하는 주요 품목들이 달라 시장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분위기가 독특하다.

[관문시장]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있는 전통시장인 관문시장은 서부정류장과 가깝고 대구도시철도역도 근처에 있어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또한 공영 주차장도 있어서 자가용을 타고 장을 보러 오는 가족도 많다. 관문시장서문시장, 칠성시장과 더불어 대구 3대 전통시장으로 손꼽히는 큰 규모의 재래시장이다. 현대화 사업으로 천장이 모두 아케이드형으로 되어 있어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장을 볼 수 있으며, 반찬, 채소, 과일, 화장품, 구제 물품 등 다양한 종류의 상품들이 같은 품목끼리 무리를 이루고 있다. 상가건물 외에도 난전이 많은 편인데 직접 나물을 캐 온 할머니들이 덤을 얹어 주며 손짓하는 풍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교동시장]

대구광역시 중구 교동에 있는 교동시장은 흔히 ‘도깨비시장’이라고도 불린다. 1950년 6·25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대구로 모이면서 생겼으며, 특히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수품과 시계 등이 주 거래 품목이었다. 달러가 암암리에 거래되기도 하여 ‘양키시장’이라고도 하였다. 1956년 3월 15일 정식으로 시장 허가를 받았으며, 현재 먹자골목, 옷가게골목, 전자골목 등이 줄지어 있고 귀금속거리로도 유명하다.

‘교동(校同)’이라는 이름은 원래 조선시대 향교가 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인데 조선 건국 초기인 1398년(태조 7) 교동시장 바로 뒤편으로 향교가 자리 잡았다. 다만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5년 위치를 옮겨 재건하였으며, 1930년대에 중구 남산동으로 옮겨 가 현재 교동시장 인근에서는 향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 시절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근대 건축물들과 근대 상가들이 몇몇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실제로 일본제국주의 점령 시기에 교동은 요릿집, 기생집, 시계방, 서점, 이발소, 목욕탕, 인쇄소, 대저택, 전기회사, 의원, 치과, 상업회의소, 대구여자보통학교[현 대구서부초등학교], 동양척식주식회사 대구지소 등이 있는 도심이었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급격히 본국으로 철수하자 한국인들이 이 자리에서 상업을 이어 나갔으며, 뒤이은 미군정 집권과 6·25전쟁 등으로 군부대 물품들이 교동시장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 미군부대에서 유출된 피엑스 물품을 판매하는 것은 당연히 위법이었으므로 단속반이 뜨면 바로 문을 닫는 도깨비시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구역 양옆으로는 군부대 보급 창고가 있었으며, 육군본부가 대구에 있는 등 군대 보급품들은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1952년에는 교동시장 안에 ‘국제시장’이라는 특구가 생겨났고, 국제카바레가 운영되기도 하였다. 1953년 휴전 이후에도 교동시장은 미군부대 물품 등을 지속적으로 취급하였으며 보따리 무역 등으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수입품시장으로 급성장하였다. 각종 수입품과 군수품 판매를 통하여 1970~198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다. 이후 전자, 전기 분야와 의류, 음식 분야, 귀금속, 컴퓨터 등의 폭넓은 상권이 형성되었다.

[대구 약령시]

대구 약령시는 조선조 효종 연간에 경상감사 임의백(任義伯)에 의하여 개설된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한약시장이다.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경상북도 영천시와 풍기군, 충청남도 금산군 등지에 인삼을 대표로 하는 한약 전문 시장이 개설되어 있으나,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시장들이다. 이에 비하여 대구 약령시는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로 문을 닫은 시기를 제외하면 약 350년 동안이나 명맥을 유지하여 온 약재 시장이니 국내에서는 비할 곳이 없다.

조선시대 당시 대구 약령시가 열릴 때면 상인들이 구름떼같이 몰려들어 서로 약재를 사겠다고 달려드는 통에 때로 싸움이나 소송을 빚기도 하였다. 이에 경상감영에서는 약령시 내에 파출소와 재판소에 해당하는 임시 관청을 두기도 하였다. 250년간의 경상감영 객사 시대를 뒤로하고 남성로 시대를 맞이한 대구 약령시는 이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 약령시 한약도매시장에는 120여 종의 국산 약재들이 올라왔지만, 중국산 약재가 대거 수입되면서 국산 약재들의 자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대구 약령시 사람들은 1993년 ‘본초연구회’를 결성하여 우리 산하의 약초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에 앞장서고 있다. 대구 약령시 사람들은 약령시 부활을 위한 꾸준한 노력으로 1978년 8월 ‘약령시부활추진위원회’ 결성과 더불어서 약령시 개장 행사를 열었으며 이후 해마다 대구약령시한방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현재 대구 약령시에는 한약 도매상, 인삼사, 한약방, 한의원, 제탕원, 제환·제분소 등 약재 관련 업소 350여 곳이 밀집하여 있다. 따라서 대구 약령시는 한방 문화의 역사, 한의약 보건교육, 한약재 관광, 한의약 도매 경제 등이 한곳에서 이루어지는 복합 문화 타운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만나는 곳]

전통시장이 활성화되는 것은 그 도시에도 선순환으로 작용하는데 지역 경제가 함께 살아나는 기반이 마련되는가하면 시장을 둘러싼 원도심 재생을 돕기 때문이다. 대구광역시는 전통시장의 역사성과 중요성을 인지하고 재래시장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등 각 시장별 활성화 전략에 나섰다. 우선 그동안 재래시장이 가진 불편한 요소를 개선하고 접근성을 높이는 데에 주력하였다.

가령 대구도시철도 1호선 칠성시장역이나 3호선 서문시장역으로 인한 교통 편의성은 시장의 현대화 시설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또한 각 시장마다 가진 차별화 전략이 대구 재래시장들의 특성이다. 옷감은 서문시장으로, 약재는 대구 약령시로, 수입품은 교동시장으로, 식재료는 칠성시장으로 특성화되다 보니 다소 멀더라도 그 시장을 찾게 하는 매력이 되었다. 무엇보다 대기업의 마트와 달리 시장이 갖는 정감을 통하여 대구 시민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점은 재래시장만의 생존 전략이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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