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서당 중건기1」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468
한자 靑湖書堂 重建記一
영어공식명칭 Chung-Ho seodang's reconstruction record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79-4]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70년 - 이후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930년연표보기 - 「청호서당 중건기1」 창작
저자 몰년 시기/일시 1934년 - 이후 사망
배경 지역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산79-4]지도보기
성격 잡기류|기문
작가 이후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에 있는 청호서원의 일제강점기 중건에 대한 이후의 기문.

[개설]

「청호서당 중건기1(靑湖書堂 重建記1)」의 배경이 되는 청호서원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 모당(募堂) 손처눌(孫處訥), 사월(沙月) 유시번(柳時藩),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을 제향하고 있다. 손처눌 생전에 청호서당에서 강학 활동을 펼쳤다. 1694년 유림의 공의로 창건하여 손처눌의 6대조인 손조서손처눌의 위패를 모셨다. 1755년 유시번을 추가 배향하고, 1764년 정호인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4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29년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1930년 중건을 완료하고 ‘청호서당’으로 편액하였다. 196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69년 상인사(尙仁祠)를 중건하였고, 1972년 청호서원으로 복원되었다.

「청호서당 중건기1」을 쓴 이후(李垕)[1870~1934]는 본관이 전주(全州)이며, 자는 선재(善載), 호는 낭산(朗山)이다.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청호서당의 중건기는 이후(李垕)의 중건기와 유도승(柳道升)[1876~1942]의 중건기가 현재까지 전한다.

[구성]

「청호서당 중건기1」청호서원의 역사, 중건의 과정, 기문을 짓게 된 계기, 서원이 아닌 서당으로 편액한 이유, 서당 중건을 도모하는 손씨 후손들을 기리는 내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청호서당 중건기1」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대구 달성에는 여덟 군데의 서원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청호서원이다. 격재 손조서모당 손처눌, 사월 류시번, 양계 정호인을 제향하였는데, 여러 서원이 훼철될 때 청호서원도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잡초가 무성하게 된 것이 60여 년이었다. 근간에 모당의 후손인 손중곤(孫仲坤)·손찬곤(孫贊坤) 두 종형제가 청호서원의 터에 미쳐 슬픈 마음이 생겨 족인들과 도모하여 각기 곡식을 내어 이자를 불려 서원 중건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이에 1929년 겨울에 처음 공사를 시작하였다. 목재를 다듬고 흙을 파서 옮기는 일에는 일체 비용을 들이지 않고 일족간에 서로 번갈아 나와서 연로한 이들은 감독하고 장정들은 부역하여 한 해가 지나 중건을 완료하고 청호서당이라 편액하였다.

중곤과 찬곤 그리고 족인인 손욱헌(孫頊憲)이 편지를 보내 기문을 써 줄 것을 청하여 몇 가지를 질문하였다. “청호라는 이름은 예전과 동일하지만 예전엔 서원이었고 지금은 서당이니 혹 제군들의 뜻에 부족한 점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대답하길, “부족한 점이 있으나 예전에는 고을에서 함께 받드는 서원이었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어 부족한 것이 있고, 분수에 행하지 못할 것이 있으니 실상을 근거로 서당으로 이름 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제군이 이 일을 도모한 것은 선조의 제사를 모시기 위함인가? 아니면 선비들과 함께 지난날처럼 학문을 강론하려는 것인가?" 하니, 두 사람이 급히 대답하길, “어찌 사사로이 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여러 사람이 거처하며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서원과 서당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 일족이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손씨들의 뜻이 정말 훌륭하였다. 서원의 설치는 본래 학문을 강론하기 위한 것이니 지금 손씨들은 이름을 버리고 실상을 보존하며, 서당 설립을 위한 힘은 사사로이 하였으나 앞으로의 일을 공적으로 하려 하니 서원이 회복되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회복된 것이나 다름없다.

[특징]

「청호서당 중건기1」은 기문을 쓰게 된 계기가 되는 사항을 직접 서술하지 않고 문답의 형식으로 보여 주고 있다. 직접 서술보다 문답의 형식이 더욱 사실적이며 설득력을 가진다.

[의의와 평가]

「청호서당 중건기1」은 정격 기문의 형식을 보인다. 의론(議論)이 위주가 되는 변격의 기문은 문학적으로 뛰어난 반면, 기문에 대한 사실 정보 전달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청호서당 중건기1」청호서당에 대한 사실 정보가 매우 상세히 제시되어 있는 작품으로, 청호서당의 중건 의미와 과정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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