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22
한자 慕明齋
영어공식명칭 Momyeongjae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1[만촌동 715-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전일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12년연표보기 - 모명재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6년 - 모명재 중수
현 소재지 모명재 -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1[만촌동 715-1]지도보기
성격 재실
양식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 와가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두릉두씨 대구 문중
관리자 수성구청|두릉두씨 대구 문중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두사충을 추모하는 재실.

[개설]

모명재(慕明齋)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참전하였다가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杜師忠)을 기리기 위하여 두릉두씨(杜陵杜氏) 문중에서 묘소 앞에 건립한 재실이다. ‘모명재’는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의 휘하 장수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두사충은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라는 직책을 맡았다. 따라서 두사충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 데 조언하였고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하였다. 임진왜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아들 두산(杜山)·두일건(杜逸建)을 데리고 매부인 진린(陳瓣) 도독과 함께 다시 출진하였다.

전란이 끝난 뒤 두사충은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귀화하였고, 조정에서는 두사충에게 대구 시내 중앙공원[현 경상감영공원] 일대의 땅을 하사하였다. 이후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 오게 되자 두사충은 자신의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겨 세거하였다. 고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을 그리워하던 두사충최정산(最頂山)[현재의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명나라 황제가 있는 자금성 쪽을 향하여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위치]

모명재수성구 만촌동 715-1에 있다.

[변천]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객사의 재목을 사 가지고 와서 건립하였다. 1966년 건물을 중수하였다. 부속 건물로 명정각(命臣閣)이 있는데,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杜漢弼)[1823~1893]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이다.

[형태]

모명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목조 기와집이다. 네모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 앞 마룻바닥에 가로지른 안방] 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 막았다.

[현황]

모명재는 두릉두씨 문중과 수성구청에서 문화재 특별구역으로 정하여 건물과 주변을 관리하고 있으며, 문화재 해설사를 배치하여 안내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모명재는 20세기 초 대구 지역의 재실 건축 형식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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