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피학살자유족회 발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127
한자 慶北被虐殺者遺族會 發掘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0년 8월연표보기~1961년 5월연표보기 - 경북피학살자유족회 발굴 사업
최초 설립지 경북피학살자유족회 -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 10-1[동성로3가 105]지도보기
성격 사회운동
설립자 경북피학살자유족회

[정의]

1960년 8월부터 1961년 5월까지 진행된 경북피학살자유족회6·25전쟁 전후 대구 지역 피학살자 유해 발굴 사업.

[개설]

경북피학살자유족회(慶北被虐殺者遺族會)6·25전쟁 전후 대구 지역에서 국가 권력에 의하여 희생된 피학살자의 유해 발굴을 주요 사업으로 진행하였다.

[역사적 배경]

경북피학살자유족회의 발굴은 1960년 8월부터 1961년 5월까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곳에서 이루어졌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의 대구지구피학살자유족회는 대구와 대구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유해 발굴 사업을 전개하였다.

[경과]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유해 발굴을 위하여 조사단을 구성하였다. 조사단은 현장 조사와 발굴을 진행하고, 학살 현장에 묘표를 제막하였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의 발굴 1호의 묘표가 세워진 곳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이었다. 가창면은 경산(慶山) 코발트 광산과 함께 6·25전쟁 발발 직후 대구형무소 수감자의 1,400여 명이 학살당하였던 곳이다. 조사단은 가창면의 용계동(龍溪洞)[현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수백여 구의 희생자를 발굴하고, 제1호 묘표를 세웠다.

조사단은 1960년 8월 31일 대구의 상인동송현동, 본리동에서 발굴을 진행하였다. 상인동에서는 1949년 겨울에 민간인 트럭을 타고 온 사람들이 학살된 것으로 경찰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검은색 교복을 입은 학생의 사체를 상인동에서 발굴하였다. 송현동에서는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949년 12월 무렵부터 1950년 2월 무렵까지 총소리가 들렸으며, 1950년 2월 16일 하루는 들리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송현동대덕산(大德山) 아래 대여섯 명씩 묶여 총살당한 구덩이가 40m, 50m 연이어 있었고, 총 500여 구의 유골과 녹슨 M1 탄피 10여 개도 함께 발견되었다. 본리동에서는 박○의 과수원 서편 계곡에서 1949년부터 1950년 6·25전쟁 직후까지 희생된 피학살자 유골을 발굴하였다. 본리동 학살지는 송현동 동남쪽 500m 지점이며, 1950년 9월 무렵 헌병들의 경비 아래 여성과 노약자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1차 발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민간인 학살이 6·25전쟁 이후 계엄령 아래에서만 행하여졌다는 경찰의 주장을 뒤엎는 증거가 되었다.

조사단은 1960년 10월 1일에 만촌동고모동에서 발굴을 진행하였다. 만촌동 형봉산 골짜기에서는 28구의 유골을 발굴하였는데, 시신을 매장한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의 주머니에서 나온 신분증으로 볼 때 대구 지역 주민들로 추정되었다고 한다. 또 1960년 10월 1일 고모동의 콩밭에서 300구 정도의 유골이 매장된 것을 발굴하였다. 경북피학살자유족의 3차 발굴은 1961년 3월 26일 송현동의 ‘똥미산‘ 기슭에서 유족 100여 명의 통곡 속에서 시굴식과 함께 진행되었다. 송현동 발굴지에서는 6·25전쟁 때 학살당한 피학살자로 추정되는 시신 100구 이상이 발굴되었다.

조사단은 1960년 9월 11일 팔공산 미대동(美垈洞)에서 100여 구의 희생자를 발굴하고, 제8호 묘표를 제막하였다. 또 1960년 9월 11일 팔공산 지묘동(智妙洞)에서 피학살자 발굴을 진행하고 제9호 묘표를 제막하였다. 그 밖에도 대구광역시 서구 평리동, 강창댐 인근 파호동 등에서도 피학살자 유해 발굴을 진행하였다.

[의의와 평가]

경북피학살자유족회의 발굴은 6·25전쟁 전후 국가 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실을 확인하는 것임과 아울러 진상 규명에 따른 책임자 처벌, 명예 회복, 위령 사업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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