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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기자구락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244
한자 大邱記者俱樂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2년 8월연표보기 - 대구기자구락부 창립
최초 설립지 대구기자구락부 - 대구광역시[요정 춘대화]
성격 기자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기자들의 친목 단체.

[개설]

대구기자구락부(大邱記者俱樂部)는 1922년 8월 요정 춘대화(春大和)에서 조선인 측 조선일보·동아일보·매일신보 대구지국에서 각 1인과 일본인 측 경성일일신문, 조선매일신문, 부산일보, 마관일일신문(馬關日日新聞), 방장(防長), 경북평론(慶北評論) 등 6개 언론사에서 각 1인 등 총 9명이 모여 상호 협의한 결과 결성되었다.

대구기자구락부는 창립총회에서 회원 자격은 현직 기자로 하고, 총회는 매년 춘추 2회로 하며, 필요에 따라 임시총회 개최, 임기 6개월의 간사 2인 선정, 회비 매월 50전 등을 결정하였다. 대구기자구락부는 1923년에는 일본어 신문 조선민보와 관문일일신문을 제외시키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조선어 신문도 빠진 채 일본어 신문 8개 사의 기자들로 운영되었다. 1923년 7월 대구기자구락부의 월례회인 대구예월회동아일보 대구지국 특파원으로 부임한 윤홍렬이 인사차 참석하였다.

[설립 목적]

대구기자구락부의 설립 당시 목적은 기자들의 융합과 친목 도모였으나 나중에는 대구의 사회문제 및 정치문제까지 논의하는 것을 추가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일본어 신문 중심의 기자들로 구성된 대구기자구락부의 활동은 대구예월회를 통한 친목 도모와 사회문제에 관한 토의에 중점을 두었다. 대구기자구락부는 1923년 2월 대흥전기주식회사를 상대로 전기료 2할 이상 인하 활동을 펼쳤다. 대구기자구락부는 1924년 2월 대구도시계획안이 사회 관심으로 떠오르면서 일본인 사회가 원안파(原案派)와 동지회[반대파]로 양분되었을 때 동지회의 입장에 서며 일본인의 이익을 대변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본어 신문 기자들로 운영된 대구기자구락부는 대구도시계획이 사회적 관심으로 떠오를 때 일본인의 이익을 대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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