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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963
한자 鄭僑源
영어공식명칭 Jeong Gyowon
이칭/별칭 오천교원(烏川僑源)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7년 4월 24일연표보기 - 정교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정교원 조선 총독부 임시 토지 조사국 서기로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17년 12월 - 정교원 경상남도 거창군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2월 - 정교원 조선 총독부 도이사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5년 9월 - 정교원 중추원 통역관 겸 서기로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29년 11월 - 정교원 전라북도 참여관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정교원 황해도 지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7년 - 정교원 충청남도 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9년 6월~1943년 2월 - 정교원 중추원 참의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1년 8월 - 정교원 흥아 보국단 상임 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정교원 조선 임전 보국단 상무 이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5년 6월~1945년 8월 15일 - 정교원 충청북도 지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9년 3월 30일 - 정교원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 체포·수감
출생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거주|이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33
거주|이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학교|수학지 성산 의숙 - 대구광역시
학교|수학지 메이지 대학 - 일본 도쿄
성격 관료
성별
본관 영일
대표 경력 중추원 참의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친일 관료.

[가계]

본관은 영일(延日). 일본식 이름은 오천교원(烏川僑源)이다.

[활동 사항]

정교원(鄭僑源)[1887~?]은 1887년 4월 24일 경상북도 달성군 서면[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1910년 조선 총독부 임시 토지 조사국 서기를 지냈다. 1917년 12월 경상남도 거창군 군수가 되었으며, 1921년 2월 조선 총독부 도이사관에 임명되었다. 1925년 9월 중추원 통역관 겸 서기로 일하였고, 조선사 편수회의 간사를 맡았다. 1929년 11월 전라북도 참여관이 되었다가, 1933년 황해도 지사를 거쳐, 1937년 충청남도 지사가 되었다. 「내선일체의 윤리적 의의」[『조선』293]를 통해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지금 사람들은 내선일체라는 것을 시세나 행정의 방편이라 말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믿는 바 내선일체는 조선 통치의 최고 이상인 동시에 실로 내선 양자의 윤리적 귀결이라 생각한다"고 강변하였다.

정교원은 1939년 6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조선 총독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의 참의로 활동하면서, 1941년 제22회 중추원 참의 회의 답신서를 통해 "정상 가일층 성전의 진의를 천명하여 반도 민중으로 하여금 황국 신민으로서의 신념을 굳히고 각오를 새롭게 할 방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 사이 1940년 2월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정신 연맹 전무 이사로 남부 지역 각 군을 시찰하였다. 1941년 8월에는 흥아 보국단의 상임 위원과 임전 대책 협의회 준비 위원, 1941년 조선 임전 보국단 상무 이사로 활동하였다. 1941년 11월 7일에는 보성 전문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지원병 보급 설전'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하여 일제의 전쟁 정책을 선전·선동하였다. 1945년 6월부터 8·15 광복 때까지 충청북도 지사를 지냈다. 1949년 3월 30일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의 집에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 특위]에게 체포 수감되었고, 1949년 6월 18일 재판이 열렸고, 재판에서 "내가 이미 저지른 죄는 나의 경력 자체가 일본의 침략 정책에 협조했다고 표시되어 있음을 이제 새삼스러이 무어라 말할 게 있겠습니까"하면서 기소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 뒤 6·25 전쟁이 발발하여 정교원에 대한 재판은 중단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정교원의 저술로 「내선일체의 윤리적 의의」[『조선』293], 「지원병의 어머니와 누이에게 드리는 글」[『삼천리』 제12월 제7호]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 관료로서 일제의 한국 지배와 침략 전쟁에 앞장섰던 정교원의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1912년 한국 병합 기념장, 1915년 다이쇼[大正] 대례 기념장, 1928년 쇼와[昭和] 대례 기념장, 1933년 훈 4등 서보장, 1935년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으로 은배 1개, 1936년 훈 3등 서보장, 1940년 4월 욱일 중수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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