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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040
한자 - 寺刹, 大見寺
영어공식명칭 Daegyeonsa Temple reach the sky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일연선사길 177[양리 산1-2]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동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대견사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휴양림길 232[용리 산1]지도보기

[정의]

비슬산 정상에 위치한 천년 고찰 대견사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

[사원 연구의 필요성, 한국 불교의 흐름을 밝힐 수 있다]

한국의 고대·중세 사회에서 불교가 국교로서 위상을 가지고, 위로는 왕공 귀족에서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삶의 지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원(寺院)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원에는 국가와 왕실, 불교계, 신앙자 등 다양한 인간 집단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었다. 국가 즉 왕실의 입장에서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확산과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한 통로였고, 불교계에서는 승려들의 수행과 거주 공간, 교학의 강론과 토론 장소, 각종 불교 의례의 설행 장소였으며, 신앙자의 입장에서도 종교적인 기복과 조상 숭배, 개인적인 민원의 해결을 목적으로 출입하는 공간이었다.

사원은 시대 흐름과 신앙의 성격 등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했다. 즉, 창건 주체에 따라 왕실과 사립 사원인 원당(願堂), 소재처에 따라 왕경과 지방 사원, 입지에 따라 평지와 산지 가람, 규모에 따라 대·중·소 사원, 사상·신앙에 따라 관음·미타·법화·미륵 신앙 등 다양한 양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사원에 대한 연구는 해당 시대의 사상과 신앙은 물론 사회 세력의 존재 양상 등 삶의 단면을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대견사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

대견사(大見寺)에 대해서는 그동안 비슬산의 불교 유적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간단하게 언급하거나, 대구 지역의 불교 사상의 변화를 살피는 과정에서 약간 다루어졌다. 그러다가 『삼국유사(三國遺事)』 피은 편의 「포산 이성(包山二聖)」조를 검토하면서 보각 국사 일연의 포산 주석을 주목하였다. 최근에는 일연의 초임지인 보당암이 곧 대견사이며, ‘『삼국유사』 찬술의 산실’이라는 연구 성과가 제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견사 중창 1주년을 기념하는 학술 논문집이 발간되어, 종합적인 이해가 가능해졌다.

한편, 대견사 터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 조사도 이루어졌다. 먼저, 2002년 9월부터 11월까지 영남 문화재 연구원에서 대견사 터의 정비·복원을 위한 발굴 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추정 건물지 6동과 석축, 적심 등이 확인되었다. 부족하나마 대견사의 실체를 처음으로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 2012년 8월에서 10월까지 계림 문화재 연구원에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건물지 8동과 적심군·배례 공간·배수로·석조·고래 등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창건 이후 보수와 증개축이 이어진 대가람의 흔적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신라 하대의 창건에서부터 최근의 중창 불사에 이르기까지, 대견사의 역사와 사상 경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대견사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직·간접적으로 그와 관련된 문헌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고, 최근에 이뤄진 고고학적인 발굴 조사 성과와 대견사의 유적·유물도 참고하였다. 대견사와 관련한 자료가 너무나 부족하여 그 역사적 실체를 찾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대구의 영산(靈山) 비슬산에 자리잡다]

대견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용리 산1번지, 비슬산 대견봉의 정상부 남쪽 하늘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다. 대견사는 크게 보고, 크게 느끼고, 크게 깨우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북쪽의 봉정사, 남쪽의 대견사라 할 만큼 전국 최고의 도량으로 이름나 있다. 세계적인 자연 유산인 비슬산 암괴류와 봄철이면 어김없이 흐드러지는 참꽃은 비슬산의 대표적인 풍광이 되었다. 대견사는 비슬산의 최정상에서 마치 하늘에서 내려앉은 듯한 이색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전국 각지에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어 있지만, 대견사처럼 산 정상의 하늘 가까운 곳에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비슬산은 팔공산과 함께 대구의 영산이자 불교의 성지이다. 대견사는 창건 이후 지금까지 천 수백 년 동안 하늘 가까이서 목탁과 독경 소리 울리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피안으로 인도해 왔다. 하늘을 바라보며 굽이굽이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그 정상에 우뚝 솟은 돌로 만든 탑과 사찰이 있다. 그곳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멀리 낙동강이 굽이치고, 그 너머로 아스라이 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하늘에 닿은 사찰, 대견사로 오르는 여정은 어쩌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일 것이다.

[신라 하대 헌덕왕 때 창건한 왕실 사찰]

대견사는 비슬산 최정봉으로 인식된 대견봉의 정상부 남쪽의 제법 넓은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문헌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대견사는 신라 하대 초기인 헌덕왕[재위 809∼825] 때에 창건된 신라 천년 고찰이었다. 이 절을 창건한 주체는 헌덕왕과 왕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대견사는 신라의 왕실에서 건립한 ‘왕실 사찰’이었다.

대견사를 창건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대마도로 상징되는 ‘왜[일본]를 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견사가 위치한 비슬산은 고대 이래로 산악신앙의 성소로 숭앙 받던 곳이었다. 하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의 삼산 오악 이하 산천 제사의 제장에는 비슬산이 포함되지 못하였다. 헌덕왕은 비슬산 정상부에 대견사를 창건함으로써, 현풍 지역 세력들의 불만을 없애고 효율적으로 지방을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와 함께 대견사는 국가나 지방 군현의 홍수나 가뭄 등 자연 재앙을 물리치는 기도처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는 고려 시대에 국가와 지역의 재난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는 자복 사찰(資福寺刹)의 기능과 동일한 것이었다. 대견사의 창건은 전통적인 산악신앙과 불교가 습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국가의 재난을 물리치는 기도처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처럼 대견사는 신라 하대인 헌덕왕 때 왕실의 발원으로 창건된 왕실 사찰로, 지세를 억눌러 대마도[왜]를 진압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전통적인 산악신앙이 불교에 습합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국가와 지역 사회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기도처로서도 기능하였다. 대견사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창건 배경을 가진 사찰이었다.

[대견사의 처음 이름은 보당암(寶幢庵)]

고려 왕조는 이전 시대인 신라와 마찬가지로 불교를 국교로 삼은 국가였다. 대견사는 신라 하대에 창건된 이후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도 그 세력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고려 시대의 상황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사료가 전해오지 않아 자세한 사정은 알기 어려웠다. 다행히 최근에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관료였던 이첨(李詹)[1345∼1405]이 지은 「보당암 중창 법화 삼매 참소(寶幢庵重創法華三昧懺疏)」라는 글을 통해 대견사를 보당암으로 추정한 연구 성과가 제출되었다. 즉, 「보당암 중창 법화 삼매 참소」의 “보당암이 비슬산 정상에 위치한다”는 구절에서, 보당암이 곧 대견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대견사는 창건 이후 고려 시대까지 보당암이라는 절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점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던 대견사 연구에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일연이 『삼국유사』 찬술을 구상한 곳]

비슬산은 고려 후기에 들어와 보각 국사 일연[1206∼1289]과 밀접한 곳이었다. 일연은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약 35년간 비슬산에 주석하였다. 1227년[22세] 무렵부터 1249년[44세]까지 22년간 보당암, 무주암(無住庵), 묘문암(妙門庵) 등의 사찰에 머물렀고[제1차 포산 시절], 1264년[59세]부터 1277년[72세]까지 13년을 인흥사(仁興社)와 용천사(涌泉寺) 등에 주석하였다[제2차 포산 시절].

대견사[보당암]는 『삼국유사』를 찬술한 일연이 22세인 1227년(고종 14)에서 1237년까지 약 10여 년 간 머문 곳이었다. 일연의 소속 종파로 보아 당시 보당암은 선종 가지산문의 사찰이었다. 이곳은 일연이 태어난 장산군[현재의 경산시]과 가까웠고, 승과에 합격한 후 처음으로 머문 초임지(初任處)였다. 대견사에서 일연은 ‘심존선관(心存禪觀)’, 즉 본격적인 선승으로서의 수행을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포산 이성」조의 기초 자료를 수집하는 등 『삼국유사』의 찬술을 구상하기도 했다.

대견사는 일연의 사상이 형성된 사찰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연은 보당암에 머물면서 몽고의 제3차 침략의 여파가 미치자, 주석처를 옮기기 위해 ‘문수 오자주(文殊五字呪)’를 외워서 감응을 얻었다. 일연 당시 대견사는 선종 사찰이었지만, 밀교 혹은 문수 신앙과도 관련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몽고의 침략으로 일연이 주석처를 옮기자 대견사는 점차 쇠퇴했다가, 고려 말에 다시 중수하였다. 최근의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신해(辛亥)’[1371년]라는 글자가 쓰여진 기와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시대의 대견사는 선종 가지산문에 속하였으며, 비슬산을 비롯한 인근 지역을 대표하는 중심 사찰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선종 승려가 머문 선종 사찰이었지만, 밀교 혹은 문수 신앙과도 밀접한 사상적인 경향을 지녔다. 특히, 고려 후기 국사였던 일연의 주석처라는 점에서 당대의 명찰(名刹)로 평가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다]

1. 보당암에서 대견사로 이름이 바뀌다

조선 초기인 1402년(태종 2) 당시의 최고위 관료였던 이첨은 국왕을 축원하고, 개인적으로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 허물어졌던 보당암을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중창 공역을 마치고 『법화경(法華經)』에 의거한 법화 예참(法華禮懺)이라는 불교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것은 고려 후기에 유행한 천태종 백련 결사(白蓮結社)를 계승한 법화 신앙에 따른 것이었다. 아울러 절의 이름도 보당암에서 대견사로 고쳤던 듯하다. 이때 법당의 주존불은 법화 사상과 밀접한 돌로 만든 장육 관음보살상(丈六觀音菩薩坐像)이었다.

특히, 최근의 발굴 조사에 법당의 방향과 주존불인 장육 관음이 안치된 방향이 서로 다른 사실이 밝혀졌다. 즉, 법당은 현풍 읍내 방향으로 향하고 있지만, 장육 관음상은 창녕 방향, 더 멀리로는 남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는 “절을 지어 대마도로 상징되는 왜를 진압한다”는 대견사의 창건 연기 설화를 뒷받침한다.

2.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대견사

대견사는 『태종실록(太宗實錄)』과 『세종실록(世宗實錄)』 등에 “대견사의 관음보살이 땀을 흘렸다.”는 기록으로 등장한다. 대견사가 국가와 왕실의 남다른 관심을 받았고, 또 나라의 어려움을 예고하는 사찰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조선 초기 대견사는 『법화경(法華經)』과 밀접한 관음 도량이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대견사는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서 비슬산에 위치한 ‘교종’ 사찰로 기록되었다. 고려 시대의 선종 사찰에서, 조선 초기가 되면 교종 사찰로 종파상의 변화가 있었다. 뒤이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현풍현 불우조에 수록되어, 16세기 전반기까지 현풍현비슬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임진왜란 이후 대견사 중창의 역사

대견사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왜적의 침입으로 폐사되었다. 대견사를 왜병이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7세기 전반인 1611년(광해 3)과 1633년(인조 11)의 두 차례에 걸쳐 크게 중창되면서 대견사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사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 폐사하였다. 불교가 국교로 기능했던 신라, 고려 시대와 달리 억불 정책이 시행된 조선 시대에는 사찰의 유지가 어려웠고, 중창 또한 쉽지 않았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대견사는 17세기 중반까지 번창할 수 있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접어들어 사찰의 규모는 점차 축소되어 갔고, 18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다시 폐사의 길을 걷고 말았다.

[항일의 의미를 지닌 사찰]

대견사는 1900년 이재인(李在寅)이 영친왕(英親王)의 즉위를 축원하기 위해 위축(位祝)을 신설하면서 다시 중창되었다. 위축은 사찰에서 국왕이나 왕비, 세자 등 왕실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기 위해 세운 전패(殿牌)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영친왕은 대한 제국 마지막 황태자로, 대견사는 영친왕을 축원하기 위한 대한 제국 황실의 원당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영친왕을 인질로 잡아간 직후인 1908년에 위축이 폐지되면서 몰락하였고, 1909년에 폐사하였다. 그리고 1917년 6월 『조선 총독부 관보』에 “대견사를 폐지한다”고 공시하면서 그 터만 남게 되었다. 일제가 관보에 대견사의 폐지를 공시한 것은, “영친왕을 축원하고 왜를 진압한다”는 항일의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견사는 대한 제국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까지 황실과 운명을 함께한 황실 원당이었고,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사된 항일의 상징이었다. 이런 점에서 2014년 3월 1일에 대견사를 중창하고 개산식(開山式)을 가진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대견사의 유물 속에 담긴 이야기]

1. 대견사 석축

대견사 터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는 신라헌덕왕 때 창건 당시의 초창 가람과 그것과 관련된 유물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초창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석축이 주목된다. 석축은 길이 40m, 높이 6m 정도의 제법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석축의 동쪽과 서쪽에는 암반이 단애면을 이루고 있는데, 양쪽의 절벽을 연결하여 평탄면을 조성하기 위해 석축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중앙부가 토압에 의해 약간 밀려나 있는 상태이다. 석축의 가운데 부분 바닥면에는 대견사의 우물에서 나온 물이 아래로 배수되고 있다. 석축은 대견사 주위로 발달한 달성 비슬산 암괴류[천연기념물]를 활용해서 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 정상부에 대규모의 석축을 쌓는 공역은 신라 왕실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대견사 우물

대견사는 재래의 산악신앙을 불교에 습합하면서 건립된 사찰이었다. 따라서 그 역할 중에는 수재(水災)와 한재(旱災), 역질(疫疾) 등을 물리치는 기도처로도 기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이 어긋나지 않는다면 대견사는 창건 당시에도 가뭄과 홍수 등 재난을 막기 위한 기도처였다. 그 전통은 고려 시대로 이어졌고, 조선 시대에는 성황사가 그러한 역할을 하였다.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논실 마을에서는 대견사 우물과 관련하여 “산의 정상에 절터가 있고 거기에 우물이 남아 있어, 가뭄이 들면 동네 사람 가운데 제관을 선발하여 가서 고사를 지내고 그 우물의 물을 퍼낸다. 그러면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절터는 ‘대견사 터’이고, 우물은 ‘대견사 우물’을 말한다. 이 전설을 통해 대견사가 기우제를 지내던 장소 중의 한 곳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대견사 우물은 사각형의 우물과 그 남쪽의 작업 공간으로 구분된다. 규모는 내부가 가로, 세로 120㎝ 정도이고 깊이는 2m 정도이다. 작업 공간은 160×120㎝ 정도의 긴 사각형으로 축조되어 있다. 현재, 이 우물은 대견사에서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3. 대견사 석탑

대견사는 비슬산의 최고봉으로 인식된 대견봉[1,059m]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절 뒤로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싸 있고, 남쪽 앞으로는 시야가 탁 트여 산악과 평야 그리고 구비치는 낙동강을 전망할 수 있는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대구와 현풍 분지는 물론, 낙동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지 조건을 갖춘 대견봉에 대견사라는 사찰을 창건함으로써, 낙동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오는 왜적을 방어코자 했을 개연성은 있어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대견사에 전해오는 ‘대견사지 삼층 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이 주목된다. 이 탑은 『현풍현 읍지』 등에는 ‘구층 석탑’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전하는 삼층 석탑은 도굴꾼에 의해 무너져 절벽 아래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1988년에 달성군에서 복원한 것이다. 대견사 석탑은 대견사의 가람 배치와는 무관하게 산 정상의 바위 위에 건립되어 넓은 시계가 확보된 점에서 산천 비보 사상에 따라 조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경주 남산 용장사지 삼층 석탑, 영동 천태산 영국사 망탑봉 탑 등이 있다. 대견사지 삼층 석탑은 옥개석의 체감 비율로 보아 3층 이상일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9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통일 신라 말기이거나 늦어도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견사를 창건해 대마도로 상징되는 왜를 진압한다는 비보 사상의 일단을 이 탑의 입지에서도 찾아 볼 수 있겠다.

대견사처럼 왜적을 진압하기 위해 건립한 대표적인 사찰로 언뜻 문무왕 때에 동해 변에 창건한 감은사가 떠오른다. 즉, “감은사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欲鎭倭兵] 창건하기 시작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으며, 그 아들인 신문왕이 완공했다.”고 한다. 또, ‘산세’를 이야기한 것은 경주의 남산 자락인 고위산에 창건한 천룡사가 있다. 즉, “『토론 삼한집(討論三韓集)』에서 계림의 땅에 객수(客水) 두 줄기와 역수(逆水) 한 줄기가 있는데, 그 객수와 역수의 근원이 하늘의 재난을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무너지는 재앙에 이른다.”고 했다. 이는 천룡사가 ‘지세를 눌러 수재를 막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 중국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며칠 안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해, 사찰의 존폐를 국가의 존망과 연결시킨 인식을 보인다. 천룡사는 고위산의 산정에서 가까운 고원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찰을 창건해 왜적을 진압한다거나, 사원이 국가의 안위와 연결된다는 인식은 신라 시대부터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대견사가 산세를 고려해 대마도[왜]를 진압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기록은 허황되지만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4. 대견사지 마애불

대구의 남쪽 비슬산의 정상에 있으면서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보당암에 주석하던 일연은 몽고의 병란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는 1236년 가을에 ‘문수 오자주(文殊五字呪)’를 외워 감응을 기다리자 문수보살이 나타나 “무주(無住)의 북쪽에 있으라.”고 계시했다. 그리고 1237년에 10여 년 간 머물던 보당암을 떠나 무주암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연이 외운 ‘문수 오자주’는 『금강정경 유가 문수사리보살 공양 의궤(金剛頂經 瑜伽文殊師利菩薩供養儀軌)』에 나오는 5자로 된 주문인 ‘아라파차나(阿羅婆遮那)’이다. 『금강정경』은 『금강정 일체여래 진실섭대승현증대교왕경(金剛頂一切如來眞實攝大乘現證大敎王經)』을 말하며, 전체 3권으로 당의 불공(不空)이 번역했다. 금강정부(金剛頂部)에 속하는 밀교계의 경전이라고 한다.

일연이 보당암에서 『금강정경 유가 문수사리보살 공양 의궤』에 나오는 ‘문수 오자주’를 외웠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보당암은 일연이 머문 선종 사찰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밀교적인 사상 경향도 있었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일연의 주문에 감응하여 문수보살이 벽 속에서 나타났다고 하였다. 보당암이 문수보살상을 봉안했거나, 최소한 탱화를 모신 전각이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연이 머물 당시 보당암은 문수보살과 관련이 있었고, 승려는 물론 일반 신도층 사이에서 문수 신앙이 성행했던 듯하다.

대견사와 밀교와의 관련성을 알려주는 유물로는, 현재 대견사 암굴 입구에 새겨진 ‘대견사지 마애불’이 주목된다. 이 마애불은 암굴의 남쪽 입구 우측 바위 위에 음각되어 있다. 음각의 문양은 하부에는 연화 대좌를 새겨 놓았다. 대좌의 상면으로는 아래가 넓은 5개의 원형을 중복되게 새겨 놓고, 원형의 아래로는 고사리 문양을 대칭되게 조각하였는데, 화염문에 휩싸인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짐작된다.

대견사지 마애불은 남원승련사(勝蓮寺) 뒷산 바위와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적멸보궁에 세워진 비석 뒷면에서 발견된 밀교 문양인 유가심인(瑜伽心印)과 거의 동일하다고 한다. 승련사의 마애불은 그 옆에 ‘옴마니반메훔’의 글귀를 새겼다. 대견사지 마애불은 암각의 하단부가 훼손되어 유실되었는데, 그 부분에 ‘옴마니반메훔’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유가심인도(瑜伽心印圖)는 깨달음의 최고 순간을 공(空)으로 나타낸 밀교의 만다라로,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세 곳에서만 발견된 희귀한 문양이다. 이러한 밀교 문양의 존재는 비슬산 일대에 밀교가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마애불의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문수 오자주’에서 엿보이는 밀교적인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5. 대견사 연화 대좌

대견사는 『조선왕조실록』 1416년(태종 16) 2월 29일과 1423년(세종 5) 11월 29일에 각각 수록되었다. 그 내용은 '경상도 현풍현 비슬산대견사의 석상(石像)인 장육 관음상이 땀을 흘렸다'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 초기 대견사 법당의 주불은 돌로 만든 석상의 장육 관음상이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장육상은 1장 6척의 불상, 또는 부처의 등신상을 뜻한다. 즉, 장육상은 16자[약 5m]의 입상을 말하며, 좌상의 경우는 입상의 3/5, 곧 9자 정도로 이 역시 장육상이라고 한다. 대견사의 장육상은 입상이었다면 높이가 5m 내외 혹은 등신상이었거나, 좌상이라면 대략 2.7m 정도였을 것이다. 아울러, 관음상이 땀을 흘렸다는 점과 그것이 중앙에 보고되어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점도 주목된다. 불상이 땀을 흘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국가에서 일어날 변고를 미리 알리는 예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 그것이 실록에 기록된 것은 조선 초기 대견사가 국가와 왕실의 관심을 받는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대견사의 석조 관음상 조성은 1402년에 이첨이 보당암을 중창하면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첨은 그가 지은 글인 「보당암 중창 법화 삼매 참소(寶幢庵重創法華三昧懺疏)」에서 『법화경』에 의거한 ‘법화 예참’을 설행했다고 하였다. 『법화경』은 관음보살과도 밀접한 경전이며, 법화 사상은 관음 신앙과 연계되기도 했다. 즉, 『법화경』 제25품인 「관세음보살 보문품」은 별도로 『관음경』 또는 『보문품경』이라 부르며, 조선 시대에 널리 독송되는 경전이었다. 이로 보아 이첨이 보당암을 중창하면서 주존불로 관음보살 석상을 법당에 모셨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관음보살과 관련하여 대견사 터 발굴 조사에 확인된 ‘석조 연화 대좌(石造蓮花臺座)’가 주목된다. 연화 대좌는 대견사 터의 중앙에 위치하며, 유적 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4호 건물지’ 내에서 확인되었다. ‘4호 건물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전체 규모는 정면 11.1m, 측면 9.2m로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 구조였다. 이 건물지의 내부 서쪽 측면 어칸에 방형의 연화 불상 대좌가 확인되어, 대견사 터에서 중심 건물로 판단되고 있다.

연화 대좌는 1.5×1.5m, 높이가 46㎝의 정방형으로 상단에 원형으로 좌대를 다듬고 외면에 2엽 8조의 연화문을 양각하였다. 상면이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비교적 완전한 형태이다. 연화 대좌는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석조 여래 입상의 대좌와 양식이 많이 닮아 관련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연화 대좌 주위에는 4×4.8m 규모로 방향의 석렬이 둘러졌는데 이것은 불단의 기초로 판단된다. 그 앞으로는 법회를 비롯한 사찰의 행사 시에 참배객들이 건물 안으로 모두 들어가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장방형의 배례 공간을 별도로 마련해 두기도 하였다. ‘4호 건물지’와 ‘연화 대좌’는 명문이 새겨진 암막새 등 출토 유물로 보아 조선 시대 전반에서 조선 중기 전반의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점까지 존속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연화 대좌의 위치로 보아 이 건물은 영주부석사의 무량수전처럼 건물은 남향이지만, 건물 내부의 본존불은 동향하여 건물과 건물 내 본존불의 방향이 서로 달랐던 점이 주목된다. 이 연화 대좌는 현재 중창한 대견사의 서편 건물과 암굴 사이 공간의 야외에 놓여 있다. 대견사의 가람 구조와 주존불의 좌향 등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물이므로, 안전한 보호 조치를 고려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연화 대좌를 통해 대견사 주존불의 좌향은 불전의 방향인 현풍 읍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창녕 방향, 더 멀리로는 남해안을 향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불상의 좌향은 “대마도를 진압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대견사의 창건 연기 설화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님을 증언한다. 이 연화 대좌 위에 장육 석조 관음상이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연화 대좌는 하대석이나 중대석 등 다른 석조물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직접 불상을 안치한 상대석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대견사의 관음보살상은 ‘입상’이 아니라, ‘좌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견사의 역사적 의미-불교를 통해 사부 대중을 하나로 묶다]

대견사는 신라 하대인 헌덕왕 때 왕실 사찰로 창건되었다. 신라의 왕도가 아닌 지방에 건립된 지방 사찰이자, 평지가 아닌 비슬산 정상부에 건립된 독특한 산정식(山頂式) 가람이었다. 대견사는 왜적을 진압하고, 전통적인 산악신앙을 습합하며, 국가의 재난을 물리치기 위한 기도처로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일연이 머물면서 비슬산을 대표하는 선종 사찰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면서도 밀교 또는 문수 신앙을 아우르는 다양한 신앙을 포용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천태종의 법화 신앙에 의거한 관음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때 법당과 주존불인 석조 관음상이 방향을 달리하는 독특한 배치 양상을 보였다. 대견사는 『조선왕조실록』에 두 차례 수록될 정도로 비슬산을 대표하는 관음 기도처로 재평가되었다. 임진왜란의 해를 입었으나, 다시 중창되면서 전성기를 맞기도 하였다.

대한 제국 시기에는 황실의 원당으로 잠시 빛을 보지만, 항일 사찰이라는 혐의로 일제에 의해 폐지되고 말았다. 대견사는 창건 이래 일제 강점기까지 국가 또는 왕실과 운명을 함께하면서, 시대적 흐름 속에 다양한 신앙을 포용하고 있었다. 국가와 왕실, 신도층을 불교를 통해 하나로 묶고, 민중들에게 친숙한 신앙을 통해 그들과 함께 호흡하였다. 대견사의 역사가 지닌 또 다른 진면목이자, 앞으로 추구해야 할 나침판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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