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221
한자 西邊洞 仁川李氏 世居地
영어공식명칭 Residential place of Incheon Lee clan in Seobyeon-dong
이칭/별칭 무태(無怠)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570년연표보기 - 이주 무태로 이거하여 정착
성격 세거지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있는 인천 이씨 세거지.

[개설]

인천이씨(仁川李氏)는 허씨(許氏)에서 갈린 분적종(分籍宗)으로 경원이씨(慶源李氏) 또는 인주이씨(仁州李氏)로도 불렸다. 이허기(李許奇)를 시조로 받들고 식읍으로 받았던 인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고려 중엽 이자의(李資義)[?~1095]와 이자겸(李資謙)[?~1126]부터 조선 초기 이징옥(李澄玉)[1399~1454]에 이르기까지 본가나 방계가 수차례 역모 사건에 휘말린 결과로 가세가 크게 위축되었으나, 연산군 때 이말흥(李末興)부터 이주(李輈) 대에 이르면서 본관인 인천보다 대구를 중심으로 탄탄한 가세를 형성하였다.

[명칭 유래]

무태(無怠)[현 북구 동변동·서변동]라는 마을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경주로 향하는 길에 잠시 주둔하면서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라[無怠警戒].”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지역 주민들이 부지런하고 태만한 자가 없는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능성구씨(具氏)는 마을 이름을 ‘무태’라 하였고, 인천이씨는 ‘태촌(台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 영조 대에 가구수가 증가하여 팔공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화천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변리(東邊里), 서쪽은 서변리(西邊里)로 분동(分洞)되었다.

[형성 및 변천]

인천이씨의 대구 입향은 연산군(燕山君) 때 창녕현감을 지낸 이말흥(李末興)이 현 수성구 파동에 정착하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이주(李輈)[1566~1604]가 1570년 팔공산 자락 망일봉(望日峯) 아래인 무태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인천이씨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이로부터 인천이씨 태암공파 분파가 형성되었다.

[자연환경]

이주가 무태에 정착할 당시 대구 지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일파이무(一巴二無) 또는 일무이파(一無二巴)라고 할 정도로 무태와 파동은 토질이 비옥하고 물이 좋은 곳으로 이름나 있었다. 서북쪽으로는 도덕산(道德山)이 둘러싸고 있고, 앞에는 동화천(桐華川)금호강이 합류되는 물줄기를 안고 있어 전형적인 취락 입지이다. 인천이씨가 세거하기 전에는 행주은씨(幸州殷氏)들이 살았다고 한다.

[현황]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인천이씨는 8만 3855명으로 조사되었다. 현재 인천이씨는 시중공파(侍中公派)·공도공파(恭度公派)·쌍명재파(雙明齋派)·충강공파(忠剛公派)·태암공파(苔巖公派) 등 5개 분파로 나뉘어 세계를 이어 가고 있다. 북구 연경동동변동·서변동인천이씨 집성촌이 있었다. 현재 동변동·서변동은 택지지구로 개발되었고 연경동은 개발 중에 있으나, 여전히 인천이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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