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의 가치가 높은 청송군의 줄다리기와 풋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1499
한자 傳承-價値-靑松郡-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언

[개설]

경상북도 청송군에서는 전승 가치가 높은 여러 민속문화가 있다. 그중에서도 정월 대보름의 줄다리기칠석(七夕)백중(百中) 사이의 풋구가 대표적이다.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에 줄을 당겨 승부를 겨루던 민속놀이로 청송 지역에서는 용전천(龍纏川) 주변에서 행하여지던 청송읍 청운리 청운마을줄다리기가 가장 유명하다. 풋구는 모내기를 마치고 칠석에서 백중 사이에 날을 정해 벌이는 일꾼을 위한 잔치이다. 주로 경상북도 중·북부 지역에서 전승되는데, ‘꼼비기’라고도 한다. 현재 줄다리기는 청송군에서 지원하는 행사로, 풋구는 동제(洞祭)를 지내고 즐기는 것으로 변화하여 전승되고 있다. 청송군의 줄다리기와 풋구는 옛 전통을 간직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보전될 가치가 높다.

[청운리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에 줄을 당겨 승부를 겨루던 대동놀이로, 두 패로 나뉘어 큰줄을 당기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경상북도 청송군에서는 예로부터 여러 마을에서 줄다리기가 행하여졌으며, 그중에서 청운리 청운마을의 사례가 비교적 자세하게 전래되고 있다.

1. 동계와 줄집

청운리에서 줄다리기의 제반 사항은 동장이 중심이 된 동계(洞契)에서 담당하였다. 청운리에는 마을을 두 편으로 구분한 아랫마을계와 윗마을계가 있었으며, 각기 유사(有司) 한 명을 두어 계를 운영하였다. 이들 두 계는 가을에 유사를 교체하는 ‘유사갈이’를 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이듬해 줄다리기에 대해 의논하였다.

청운리에서는 두 마을계의 유사들 외에 특별히 줄다리기의 제반 사항을 담당할 줄집이라는 소임(所任)을 두었다. 줄집은 마을에서 학식, 덕망, 재력을 갖추고 열의가 높은 사람 중에게 선정하였다. 줄집은 줄다리기 준비 과정에 소요되는 적지 않은 경비를 기꺼이 들일 만큼 줄다리기에 대한 애착이 높고, 재력도 충분히 갖추어야만 하였다. 청운마을에서 줄집의 헌신을 기반으로 전승되었던 줄다리기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단되었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 무렵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화를 당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줄다리기를 재개하였다. 이렇게 1957년에 부활된 청운리줄다리기는 예전처럼 줄집에 맡기지 않고, 마을의 반장들이 집단적으로 줄집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2. 편 가르기

청운리줄다리기는 마을을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두 편으로 나눠 행하였다. 윗마을과 아랫마을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마을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도로와 골목이 교차하는 삼거리를 기준으로 구분하였다. 줄다리기를 행할 때에는 마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마을 사람들의 친인척이나 인접한 마을의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줄을 당겼다. 청운리의 풍물패가 가급적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위해 인근의 여러 마을을 다니며 참여를 독려하였다.

3. 애기줄과 큰줄

정월 초순이 되면 대여섯 살가량의 어린아이들이 모여 마을 곳곳에서 줄을 당기기 시작한다. 점차 줄다리기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연령이 높아지고 인원도 늘어나면서 열기를 더해 가면 어른들 사이에서도 줄다리기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간다. 큰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면, 아랫마을과 윗마을을 가리지 않고 행하였던 아이들의 줄다리기도 이때부터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의식적으로 구분하기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승부욕이 강한 어른들이 나서서 같은 마을의 아이들이 승부에서 이기도록 지도를 해준다.

정월 열흘 무렵이 되면 그동안 아이들이 사용하였던 애기줄을 모아 큰줄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였다. 큰줄은 정월 열흘 무렵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정월 보름이 지나야 완성된다. 줄다리기는 이르면 정월 열엿새나 열이레부터 행하였으나, 늦으면 2월 초하루나 그 이후로 미루어지기도 하였다.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 이전에는 행하지 않았으며, 늦어도 2월 보름 이전에 행하였다.

4. 줄 만들기

줄을 만드는 일은 짚을 모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짚을 모으러 다닐 때는 각 마을별로 풍물패를 앞세웠는데, 풍물패 뒤로 수십 명의 아이들이 따라다녔다. 만약 방문한 집에서 짚을 주지 않거나, 짚의 양이 살림살이에 비해서 부족하면 아이들이 놀리곤 하였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놀리는 말을 듣기 싫어서라도 형편껏 짚을 내놓았다.

이렇게 모은 짚을 줄집의 집으로 옮겨 가닥줄을 만들기 시작한다. 가닥줄은 한 가닥으로 이루어진 줄로 몸줄을 만드는 바탕이 되며, 그 길이가 150㎝에서 200㎝가량 되었고, 굵기는 10㎝에서 15㎝ 정도 되었다. 큰줄을 만드는 데 필요한 가닥줄은 80가닥에서 100가닥 정도였다. 가닥줄이 완성되면 줄다리기를 행하는 용전천으로 옮겨와서 큰줄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청운리에서 줄을 만드는 방식은 독특하다. 하나씩 틀어서 만든 가닥줄을 바닥에 펼칠 때에 반을 구부려 접어놓는다. 모든 가닥줄을 구부려 늘어뜨려 놓은 후에, 펼친 줄의 구부러진 부분을 새끼줄로 감아서 줄머리를 만들고, 이어서 줄목을 만든다. 그 뒤 가닥줄을 하나씩 엮어나가 전체를 모두 연결시키고, 줄에 탄력을 주어 잘 끊어지지 않도록 물을 뿌리고 밟는 과정을 몇 차례 거친다.

탄력을 주는 과정이 끝나면 줄머리 부분에 서까래를 집어넣어 줄머리를 고정시키고 한쪽 방향으로 돌린다. 줄이 완전히 꼬아지면 새끼줄로 군데군데를 빈틈없이 묶어서 몸줄을 완성한다. 그 뒤 종줄을 달아서 줄을 완성한다. 이렇게 만든 줄의 길이는 70m에서 100m가량 되었고, 줄의 굵기는 성인 남성이 줄에 올라탔을 때 발이 땅에 안 닿을 정도였다.

5. 줄다리기

청운리줄다리기는 밤에 이루어졌다. 곳곳에 횃불을 켜 놓고 수천 명이 당기는 줄은 장관이었다. 그러나 1957년에 줄다리기를 재개한 후로 밤에 하지 못하게 하여 낮에 줄다리기를 하였다. 밤에 줄다리기를 할 때는 사람들이 많이 다치기 때문에, 경찰이 직접 나와서 지켰다. 줄다리기를 하는 날 아침이 되면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줄을 당기러 온 사람들, 장사치들이 운집해 용전천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로 떠들썩하였다.

줄다리기를 시작하기 전, 줄집을 맡은 사람이 개울 건너의 산에 있는 서낭당을 향해 절을 올리는 의례를 행한다. 이때 양편의 줄을 바로 끌어오지 않고 풍물패와 함께 어우러져 놀이판을 벌이면서 서로 기세를 올린다. 이 과정에서 참가자들은 자기편의 줄을 지키고 상대편의 줄을 침범하기 위해, 돌파를 시도하고 육박전을 벌이는데, 이것을 줄싸움이라고 한다.

줄싸움과 기세다툼을 거듭하다가 오후가 되면 고함소리와 함께 두 줄을 결합할 지점까지 운반한다. 줄을 옮기고 나면 윗마을의 숫줄과 아랫마을의 암줄을 걸고 종나무를 끼워 결합한다. 암줄과 숫줄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양편이 상대편의 줄머리를 자기편 쪽으로 끌어오려고 다투는 줄멕이 싸움이 벌어진다. 이 싸움은 큰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힘이 세고 건장하거나 형제가 많은 집의 장정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청운마을 노인들은 "줄을 당기는 것은 전쟁이었다."라고 회상한다. 그만큼 싸움이 치열하였음을 말해 준다. 줄멕이 싸움이 어느 정도 잦아들면 저녁시간이 다가오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몸줄에 달린 종줄을 잡고 있다가, 줄집을 비롯한 각 편의 지휘부에서 고함과 깃발 등으로 신호를 하면 줄을 당기기 시작한다.

줄다리기의 승부가 쉽게 나지 않으면, 양편의 용맹한 이들이 줄머리 부분으로 이동하여 ‘훌태기’를 시도하였다. 훌태기는 상대편의 줄목 부분으로 넘어가서 상대편의 장정들을 물리치고 줄목을 점거하는 것이다. 팽팽하게 접전을 벌이다가 갑자기 줄을 놓아버리면 상대편은 뒤로 넘어지게 된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줄머리로 넘어가 상대편을 물리치고 줄목을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격렬한 육탄전이 전개되어 부상자가 속출한다. 그러다가 어느 한 편에서 상대편의 줄목을 장악하면 승부가 결정된다. 줄의 머리 부분을 상대편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힘을 써도 상대편 줄이 끌려오지 않고, 줄목 부분을 약하게 만드는 독특한 줄 제작방식으로 인해 줄목이 터져 승부가 결정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줄다리기의 승부가 결정되었다고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양편은 서로 상대방의 줄에 올라타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두 번째의 줄쌈이다. 이때도 격렬한 육박전이 전개된다. 두 번째의 줄쌈은 한밤중에 벌어지기 때문에 얼굴을 가리지 않고 싸움을 벌임으로써 그만큼 부상의 위험성이 높았다.

6. 줄의 처리

줄다리기가 끝난 다음 날, 줄을 한쪽 편에 감아 놓는다. 이렇게 감아 놓은 줄은 동장의 관리하에 보관하였다가 줄집 및 반장들과 협의하여 적당한 가격에 매각하였다. 줄로 사용한 짚을 소가 먹으면 병이 나지 않고 새끼를 잘 낳는다는 속신(俗信)이 있고, 여러 사람이 힘을 주고 당겼기 때문에 짚이 부드러워져서 소가 잘 먹기 때문에, 줄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줄을 매각한 돈은 줄집을 맡은 이에게 3~4할 정도 배당하고, 나머지는 마을의 기금으로 활용하였다.

7. 현황

2017년 현재 젊은 세대들이 지역을 떠나고 주민들이 고령화됨에 따라 자체적으로 줄다리기를 하는 마을은 없다. 청송군청청송문화원이 격년으로 10월경에 개최하는 청송문화제에서 읍면 대항 줄다리기 대회를 한다. 용전천 변 체육공원에서 진행되며 읍면별로 장정들이 팀을 이루어 참가한다.

[풋구]

1. 유래와 의미

풋구는 농부들이 모내기를 마치고 음력 7월 초·중순 무렵에 마을 단위로 날을 정해 꼬박 하루를 먹고 노는 잔치이자 의례이다. 풋구는 농번기에서 벗어나는 시점에 농민들의 노동의 피로를 씻어내고, 재배에서 수확으로 넘어가는 노동 주기의 새로운 순환을 알리는 의미가 있다. 동시에 풋구는 매년 결성되던 두레와 같은 협업 조직이 제기능을 발휘한 것을 확인하고 해체하는 의식이었다.

풋구가 전 지역에서 보편화된 풍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 이앙법(移秧法)과 도맥(稻麥) 이모작(二毛作)이 일반화됨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다. 수리시설의 확충으로 논 면적이 늘어나고, 새로운 농법으로 인해 집약적인 노동력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마을 단위의 공동 협업노동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노동을 매듭짓는 풋구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풋구는 다른 지역에서 호무걸이 또는 호무씻이로도 부르는데, 이러한 명칭은 일 년 동안의 영농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하는 작업이 호미를 이용한 김매기였기 때문이다. 경상북도 청송지역에서 사용되는 풋구라는 명칭은 들판의 풀을 제거한 뒤 하는 굿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짐작되며, 초연(草宴)이라고도 한다. 청송지역은 영농이 발달한 동시에 산간 지방이 많아, 돋아난 잡초나 풀들을 제거하고 마을길을 청소하는 것으로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함에 따라 이러한 풍습이 정착된 것이다.

2. 현황

경상북도 청송군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러한 풋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농어촌 인구의 고령화와 인구 유출로 중단되거나 간소화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이런 변화에 따라 풋구를 동제와 겸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부남면 하속2리 갈미마을과 주왕산면 신점2리 내법수마을은 양력 8월 15일에 광복을 기념하는 동시에 동제와 풋구를 함께 치르고, 동제를 치른 뒤 마을회관에 모여 술과 음식을 즐긴다.

반면 2017년 현재도 풋구를 전승하는 마을도 있다. 안덕면 문거1리 문거마을은 8월 5일경 동회(洞會)를 열어 날짜를 정하고 풋구를 행하고 있다. 예전처럼 직접 음식을 장만하는 대신 마을에 인접한 숲에 출장뷔페를 불러서 잔치를 벌이고 있다. 과거에는 풍물놀이를 하고 소를 잡는 등의 큰 정성을 들였지만, 현재는 규모가 줄어 돼지를 잡는 정도이다. 비록 잔치를 준비하는 과정은 현대화되었으나, 문거마을의 풋구는 옛 전통을 전승한다는 측면에서 보전의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05 행정지명 현행화 부동면 -> 주왕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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