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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637
한자 高德鵬
영어공식명칭 Go Deokbung
이칭/별칭 남익(南翊),여곡(麗谷)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2년연표보기 - 고덕붕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26년연표보기 - 고덕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93년 - 고덕붕 승정원 좌승지 증직
출생지 무장현 - 전라북도 고창군
활동지 부안현 - 전라북도 부안군
묘소 고덕붕 묘 -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로 449-40[가평리 산80번지]
성격 의병
성별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개설]

고덕붕(高德鵬)[1552~1626]은 임진왜란 때 흥덕의 남당(南塘)[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남당마을]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부안 호벌치(胡伐峙) 전투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가계]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남익(南翊), 호는 여곡(麗谷). 아버지는 참봉 고응진(高應軫)이다.

[활동 사항]

고덕붕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족형(族兄) 제봉(霽峰) 고경명(髙敬命)이 작성한 창의 격문을 보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첨중추(僉中推) 채홍국(蔡弘國) 등과 함께 금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금산에서 고경명이 순절하자 고덕붕 등은 남은 의병을 수습하고 흥덕[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일대 옛 고을 이름]으로 귀향하였다.

얼마 후 고덕붕을 포함한 92명의 의사(義士)는 뜻을 모으고 흥덕현의 북쪽 남당에서 삽혈(揷血)하며 동맹(同盟)을 맺었다. 당시 모인 사람들이 고덕붕을 맹주(盟主)로 추대하였다. 고덕붕은 그 자리에서 “신체와 터럭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았고 지금 임금은 우리의 부모이니 어찌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위급한 부모를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후 고덕붕은 의병을 거느리고 담양, 곡성, 순천의 쌍암·주암, 남원, 순창의 적벽강에서 전투를 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채홍국의 『야수실기(野叟實記)』 등에는 고덕붕이 의병들을 이끌고 이동한 경로만 기록되어 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지은 고덕붕의 묘갈명에 따르면, 왜적의 두목을 사로잡았는데 모두 죽이고자 하였지만 고덕붕이 죽이지 않고 적정(賊情)을 상세히 탐문하여 전투할 때마다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고덕붕은 명군(明軍)의 지원으로 왜적이 물러가고 명의 제독(提督)이 주화(主和)를 주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귀향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덕붕은 다시 의병을 모았고, 맹주로 추대되었다. 흥덕 장등에 쳐들어온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부안 호벌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고덕붕은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봉양하며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고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묘소]

고덕붕의 묘는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로 449-40[가평리 산80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93년(고종 30)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었고, 유림의 추천으로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내옥길 160-2[옥제리 473-1번지]에 있는 옥제사(玉堤祠)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남당길 6[용반리 461-1번]에 있는 모충사(慕忠祠)에 향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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