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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177
한자 巴山里
영어공식명칭 Pasa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파산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용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전라북도 부안군 건선면 파산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전라북도 부안군 건선면 파산리에서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파산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2.38㎢
가구수 137가구
인구[남/여] 224명[남 116명/여 108명]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파산(巴山)마을은 지형이 비파(琵琶) 형국이어서 ‘비아목’ 또는 ‘파산(琶山)’이라 하였다는 설[『한국 지명 총람』]과, 마을의 지형이 사옥혈(蛇屋穴)[뱀들의 집]로 뱀이 많으므로 ‘사옥리(蛇屋里)’에서 ‘파산리(琶山里)’로 고쳐 불렀다는 설[『전설지』], 뱀을 뜻하는 비아목으로, 역시 뱀을 뜻하는 ‘파(巴)’ 자가 싫어 ‘파(琶)’ 자로 고쳤다는 설[『부안 땅 이름·마을 이름 속의 역사 문화 이야기』] 등이 전한다. 어느 시기에 고쳐졌는지 알 수 없으나 1789년(정조 13) 간행된 『호구 총수(戶口總數)』에는 ‘파산리(琶山里)’로 기록되어 있으나 1914년부터 ‘파산리(巴山里)’로 고착화되었다.

관동(冠洞)마을은 파산마을 서쪽 잔등 너머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로 조씨(趙氏)와 한씨(韓氏)가 정착하여 생계 수단으로 갓과 망건을 만들어 팔아서 ‘갓골’이라 불렸다. 예전에는 험한 산중이었으나 조씨가 마을 앞 황무지를 열심히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관동 앞들을 ‘조고라실’이라고 부르며, 조고라실에 농수가 부족하므로 한씨가 샘을 파니 수원이 풍부하여 마을의 식수는 물론 조고라실에 농수로 사용하였다 하여 이 샘을 ‘한새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월평마을은 지세가 반달 모양이어서 ‘달 월(月)’ 자를 차입하여 ‘월평(月坪)’이라 이름하였다. 신성마을은 금계포란(金鷄包卵) 형의 명당 터가 있다 하여 ‘계룡(鷄龍)’이라 불렀으나, 새 마을이 형성되면서 ‘신성(新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건선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건선면의 관동리, 계룡리와 월평리, 용점리, 신성리, 목하리, 율지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건선면 파산리로 개설하였다. 1931년 7월 건선면을 줄포면으로 개칭하였다.

[자연환경]

줄포면 소재지에서 동북 방향으로 5㎞ 지점으로, 정읍으로 가는 길의 율지마을 남쪽 언덕 너머에 있다.

[현황]

파산리의 동쪽은 정읍시 고부면의 신흥리와 강고리, 남쪽과 서쪽, 북쪽은 줄포면난산리, 신리, 장동리, 대동리와 접한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면적은 2.38㎢이며, 동파산리·서파산리·관동리·월평리·신성리의 5개 행정리에 137가구, 224명[남 116명/여 10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파산마을과 서파산마을에는 뱀이 많았는데 19세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1772~1840]과 함께 ‘삼필(三筆)’로 불리는 전주 사람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뱀방이’를 써서 집집마다 붙이게 했더니 뱀이 모두 사라졌다. 이삼만은 자신의 아버지가 뱀에게 물려 죽자 뱀을 원수로 여기고 산으로 들로 다니며 뱀을 찾아 보이는 대로 때려죽였고, 이 때문에 뱀들에게는 이삼만이 저승사자와 같아서 ‘이삼만(李三晩)’이라는 이름을 듣거나 글자만 보아도 숨어 버린 것이다. 그 후 파산리에서는 매년 정초 상사일(上巳日)[정월 첫 뱀날] 백지에 한자로 ‘李三晩’이라고 써서 해뜨기 전 집 안 곳곳에 거꾸로 붙여 뱀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뱅[防]이를 하게 되었다는데, 이렇듯 ‘뱀방이’를 써 붙이는 풍속은 파산리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월평마을은 파산마을 서쪽의 관동마을에서 서북쪽으로 잔등 너머에 자리한다. 마을 앞으로 줄포-고부-정읍으로 통하는 지방도 제710호선이 지나며, 줄포 시내로부터 약 4㎞ 지점이다. 도로 건너에 대동들이 펼쳐져 있다. 들판을 끼고 있는 데다 줄포-고부 간 길목이어서 예전에는 싸전[미곡상]들이 번성하였는데, 도정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시절에는 토매[벼의 껍질을 벗기는 데에 쓰던 맷돌 모양의 농기구]와 절구로 방아를 찧어 싸전을 운영하였다. 방죽 월평제는 1938년 가뭄이 심하여 한해(旱害) 구호 대책 사업으로 만들었다.

신성마을은 파산마을에서 서남으로 맨 끝 지점, 난산리 미영골과 잔등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다. ‘녹두 장군(綠豆將軍)’으로도 불리던 전봉준(全琫準)이 왜군에 쫓겨 한때 신성마을에 피신하였다고 전하며, 마을 서편 야산에는 야수(野叟) 채홍국(蔡弘國)[1534~1597]의 묘가 있다. 채홍국은 정유재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는데, 고창을 거쳐 부안으로 쳐들어오던 일본군을 상서 호벌치에서 맞아 싸우다 아들, 일족 30여 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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