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893
한자 新安祠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사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97년연표보기 - 신안사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797년 - 신안사 훼철
개축|증축 시기/일시 1807년 - 신안사 재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08년 - 신안사 우암 송시열 배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19년 - 신안사 익제 이제현 추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23년 - 신안사 수암 권상하 추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38년 - 신안사 남당 한원진 추배
훼철|철거 시기/일시 1868년 - 신안사 대원군의 명으로 다시 훼철
원소재지 신안사 -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매내길 2-54[신흥리 70번지]지도보기
성격 사당|사우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신흥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사우.

[개설]

신안사(新安祠)는 주자(朱子), 백이정(白頤正)[1247~1323]을 배향(配享)하기 위해 보령시 남포면에 세운 사우(祠宇)이다. 주자, 백이정, 송시열(宋時烈)[1607~1689], 이제현(李齊賢)[1287~1367], 권상하(權尙夏)[1641~1721], 한원진(韓元震)[1682~1751] 등 6인을 배향한다.

[위치]

신안사남포면 옥서리에 있는 남포면행정복지센터에서 서남쪽으로 약 3㎞ 떨어져 있다.

[변천]

신안사(新安祠)는 1797년(정조 21) 남포현감(藍浦縣監) 권상신(權常愼)[1759~1824]과 남포 지역의 유림의 노력으로 설립되었다. 신안사 설립의 계기는 보령 청라 지역에 17세기 초 이지함(李之菡)[1517~1578]을 배향한 화암서원(花巖書院)이 설립 및 사액(賜額)되었으나 남포 지역에는 18세기 후반까지 서원이 없던 것과 신안 지역의 지명이 옛날 주자(朱子)가 살던 중국의 지명과 부합하다는 점이었다.

1797년 남포현감 권상신과 향교 재임(齋任) 김우필(金愚弼) 및 지역 유림의 노력으로 남포현 신안면에 주자를 배향하는 신안사를 건립하였다. 같은 해 남포 지역 출신의 고려 시대 유학자인 백이정의 사당을 함께 건립하였다.

1797년 8월 충청도관찰사 한용화(韓用和)[1732~1799]가 남포현을 순시하다 새롭게 백이정의 사당이 건립되는 것을 보고 금령(禁令)이라 하여 백이정사당과 함께 이미 건립된 주자 영당의 훼철(毁撤)[헐어서 치워 버림]을 명하였다. 이 기록은 『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 21년 8월 29일조에 기록되어 있다. 결국 신안사는 건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훼철되었으며, 권상신에 이어 현감이 된 윤기(尹愭)[1741~1826]는 서원 설립에 제제를 가하지 않은 이유로 파직되었다. 1807년 보령 지역의 진사 이의준(李宜俊), 백동섭(白東攝) 및 지역 유림의 노력으로 신안사가 다시 건립되었다. 새롭게 건립된 신안사는 이전의 신안사 터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었다.

1808년에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배향하였고, 1819년에는 익재 이제현(李齊賢)[1287~1367]을 추배하였다. 1823년에는 수암 권상하(權尙夏)[1641~1721], 1838년에는 남당 한원진(韓元震)[1682~1751]을 추배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정책으로 1868년 이후 훼철되어 현재에 이른다.

[현황]

신안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으로 1868년 훼철된 이후 현재까지 복설(復設)되지 못하고 터만 남아 있다. 남포면 신흥리 70번지 일대에 몇 개의 초석과 ‘서원터’, ‘홍살문앞’과 같은 지명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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