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사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883
한자 千房寺址
분야 종교/불교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산49-1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정성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5년 4~11월 - 천방사지 발굴 조사
소재지 천방사지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산49-1 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산49-1 일원에 있는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 사이에 창건된 천방사 절터.

[위치]

천방사지(千房寺址)보령시 미산면 용수리에 있는 양각산(羊角山)의 동쪽 지맥 말단 구릉상에 자리하고 있다. 천방사지의 동쪽 편은 보령댐 건설로 인해 만들어진 보령호와 인접해 있다. 보령댐 건설 이전 천방사지 인근의 마을에 천 칸의 절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천방사지 발굴 조사는 보령댐 건설로 인한 수몰 지역 유적 확인 조사의 일환으로 공주대학교박물관에서 1995년 4월부터 11월까지 2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천방사지는 완만한 구릉 사면을 평탄하게 조성하고, 4동의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체로 기와류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외에 토제(土製) 소탑편(小塔片)과 토기류, 자기류, 납석제(蠟石製) 용기(容器), 청동 장식 등이 있다. 토제 소탑편은 금당으로 추정되는 건물지에서 출토되었다. 소탑은 탑의 기단부편, 탑신편, 옥개편 등이 대부분이다. 옥개의 낙수면을 표현한 소탑편에는 기왓골과 기왓등이 표현되어 있다. 수키와의 끝부분에는 10엽 단판(單瓣) 연화문(蓮花文) 수막새[목조 건축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가 새겨져 있어 탑이 세밀하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출토된 기와 중에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기와도 다수 발굴되었다. 기와에 새겨진 명문은 ‘천방(千方)’, ‘영흥사 송와초 중창(永與寺 送瓦草 重創)…’, ‘신사월일 백사산인(申四月日 白四山人)…’ 등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 다수의 토기류와 소량의 청자 및 분청사기 등이 수습되었다.

천방사지에서는 사지와 중복되거나 인접하여 14기의 기와 가마터가 발굴 조사되었다. 기와 가마터 14기 가운데 3기는 천방사지 건물지와 중복된 형태로, 4기는 건물지의 남단부 경사의 상단에, 그리고 2기는 건물지 서남단에, 나머지는 건물지에서 훨씬 떨어진 후면에 자리하고 있다. 기와 가마터는 천장부를 비롯하여 벽면, 연도부(燃道部)가 대부분 파괴·유실된 상태로 남아 있다. 기와 가마터는 천방사가 조성, 운영되면서 건물에 소요되는 기와를 생산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다른 지역에도 공급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형태]

금당(金堂)[절의 본당으로 본존불을 모신 건물] 건물로 추정할 수 있는 중심 건물지는 동향을 향한 채 중앙부에 조성되었다. 금당의 후면에 해당하는 서쪽에는 규모가 작은 2동의 건물지가 남북 동일 축 선상에 배치되어 있었다. 나머지 한 동의 건물지는 금당의 건물지보다 한 단 낮게 대지를 정리한 후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금당으로 추정되는 중심 건물지에서는 초석(礎石)[주춧돌] 4매와 적심석(積心石)[기둥을 올리기 위해 초석과 함께 건물 밑바닥에 까는 돌], 기단(基壇)[건축물의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 등의 유구(遺構)[옛날의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잔존물]가 확인되었다. 중심 건물지는 정면 7칸, 측면 6칸에 전체 면적은 약 530㎡[약 160평]로 추정된다. 금당지 후면에 세워진 건물지 2동은 각각 정면 6칸, 측면 4칸과 정면 2칸, 측면 2칸의 건물지이다. 남향한 건물은 정면 4칸의 규모만 확인된다.

[의의와 평가]

천방사지는 유구와 기와 및 토기 등의 출토 유물로 보았을 때,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 사이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후 조선 초기까지 법등(法燈)이 이어온 사찰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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