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당리 의령 남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723
한자 冠堂里 宜寧 南氏 世居地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관당리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문광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집성촌
가구수 1998년 50여 호가 있었지만, 현재는 거주하는 후손의 거의 없는 상황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관당리에 있는 의령 남씨 세거지.

[개설]

의령 남씨는 18세기에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관당리 지역으로 이거하면서 입향하게 되었다.

[명칭 유래]

관당리(冠堂里)는 갓굴의 한자식 표현인 관동(冠洞)과 당재[갓굴 북쪽에 자리한 마을]의 한자식 이름인 당현리(堂峴里)에서 따온 명칭이다.

[현황]

관당리에서 의령 남씨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은 관당3리인 간드리마을[관당리 남쪽 마을]이었다. 남포 현감의 묘소를 포함하여 6기가 원래 관당리에 있었지만, 2015년에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으로 이장되었다. 1998년 50여 호가 있었지만, 현재는 거주하는 후손들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입향경위]

의령 남씨관당리 입향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전해진다.

첫 번째는 남포 현감과 백씨 성을 가진 부자와의 이야기이다. 과거 무창포(武昌浦)에 군량미를 저장하는 해창(海倉)이 있을 때 남씨 성을 가진 남포 현감이 갓굴을 지나다녔다. 이때 갓굴에는 백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백씨 부자와 남포 현감이 장기 내기를 하여 남포 현감이 이기면서 백씨의 재산을 모두 빼앗자 백씨는 관당리를 떠났다. 이후 남포 현감의 후손이 입향하면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남국삼(南國三) 집안의 이야기이다. 의령 남씨의 선대들 묘소는 원래 충청도 아산시 음봉면에 있었다. 현존하는 의령 남씨 후손의 12대조 남국삼은 명궁으로 유명하였는데, 실수로 사촌을 활로 쏘아 죽이게 되면서 집안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남국삼의 부인이 아들 두 명을 데리고 관당리로 이주하면서 입향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관련유적]

관당리에는 1998년에 후손들에 의해서 건립된 의령 남씨 세천비(世阡碑)가 있다. 비석에는 의령 남씨 출신의 정승(政丞), 대제학(大提學), 판서(判書), 부마(駙馬)[임금의 사위], 문과급제(文科及第) 등의 인원수뿐만 아니라 의령 남씨의 시작인 1세부터 27세손까지의 이름과 관직이 모두 적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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