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29
한자 朝鮮 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문광균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 왕조 시기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역사.

[행정구역]

조선 시대 보령 지역은 서로 독립적인 행정 구역인 보령현(保寧縣)남포현(藍浦縣)으로 나뉘어 있었다. 보령현남포현은 서로 다른 역사·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보령현은 “본래 백제의 신촌현(新村縣) 이었는데, 신라 때에 신읍(新邑)이라 고쳐 결성군(潔城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는 운주(運州)에 붙였고, 예종(睿宗) 원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다.”라고 하였다.

남포현은 “본래 백제의 사포현(沙浦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서림군(西林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가림현(嘉林縣)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신우(辛禑) 때에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으므로 공양왕 2년에 진성(鎭城)을 설치하고, 유리해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안집(安集)시켰다. 본조 태조 6년에 병마사겸판현사(兵馬使兼判縣事)를 두었더니, 세조 12년에 진은 혁파하고 다른 예와 같이 현감으로 하였다.”라고 하였다.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영조 41)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보령현은 3,337호에 남자가 6,032명, 여자가 7,870명, 남포현은 4,001호에 남자가 6,865호, 여자가 9,07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1789년(정조 13) 전국의 호구 총수를 기록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보령현은 4,106호에 남자가 8,221명, 여자가 9,315명, 남포현은 4,246호에 남자가 7,075명, 여자가 9,364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군사]

조선 시대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든 대표적인 시설에는 성(城)과 진(鎭)이 있다. 보령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진성(鎭城)이 설치되면서 군사 요충지가 되었고, 1397년(태조 6) 태안의 순성진(蓴城鎭), 덕산의 이산진(伊山鎭)과 함께 남포진(藍浦鎭)이 설치되어 충청도 육군의 주요 방어처가 되었고, 종3품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파견되었다. 1457년(세종 3) 방어 체제가 지역 단위 방어 전략인 진관(鎭管) 체제로 개편되면서 보령과 남포의 육군은 홍주의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의 지휘를 받았고, 수군은 보령의 충청수군절도사(忠淸水軍節度使)의 지휘를 받았다. 보령은 충청도 수군의 최고사령부였다. 충청수영의 지휘를 받는 진은 15세기 대회이포·오근이포·구정·서천포·고만량·파치도·당진·대진이 있었고, 16세기 이후 요아량수·소근진·마량진·당진포·파지도·서천포, 17세기 중반 이후 소근진·마량진·안흥진·평신진·서천포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보령현에는 돌로 쌓은 읍성 안에 3개의 우물이 있었으며, 남포현에는 돌로 쌓은 읍성 안에 3개의 샘이 있다고 하였다.

[교통·통신]

육상 이동과 운송을 위해 역원(驛院)과 봉수(烽燧)가 설치되었다. 공적인 목적으로 지방을 이동하는 관리 등에게 말을 제공하는 곳이 역(驛), 숙식을 위해 사용하는 장소가 원(院)으로 일반적으로 함께 사용되어 역원이라 하였다. 충청도에는 조선 시대 5개의 역도가 있었는데 보령현을 지나는 것이 홍주에 찰방(察訪)을 둔 금정도(金井道)이다. 금정도는 16개의 역으로 이루어져 있고, 보령현에 있던 역은 청연역(靑淵驛)으로 현재 위치는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 관산리 역말이다. 공주에 찰방을 둔 이인도(利仁道)는 보령시 남부를 지났는데, 9개의 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중 남전역(藍田驛)남포현에 속하였으며, 현재 위치가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남전마을이다. 보령 지역의 원은 청라원[청라면 라원리남천원[주산면 창암리보원[보령현 3리횡천원[성주면 개화리갈두원[대천동 갈머리]·위수현원[청라면 장현리]가 있었다.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급한 소식을 알리는 것으로 보령 지역의 봉수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과 자체적으로 해안 감시를 통해 얻은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하였다. 보령 지역의 봉수대는 덕산 봉수대[웅천읍 죽청리등경산 봉수대[남포면 제석리통달산 봉수대[웅천읍 소황리옥미봉 봉수대[웅천읍 두룡리]·신흥리 봉수대[남포면 신흥리]·대천리산성 봉수대[웅천읍 대천리조침산 봉수대[주교면 송학리흥양곶 봉수대[천북면 사호리망해정 봉수대[오천면 영보리원산도 봉수대[오천면 원산도리녹도 봉수대[오천면 녹도리외연도 봉수대[오천면 외연도리]·어청도 봉수대[군산시 옥서면 어청도리]가 있었다.

[경제·사회]

조선 시대 세금은 곡식과 포(布)와 같은 현물을 주로 징수하였다. 이를 수로와 해로를 통해 지역의 조창(漕倉)에 모아 중앙의 경창(京倉)으로 보냈다. 충청도 모든 군현의 세곡(稅穀)은 아산의 공세곶창(貢稅串倉)에 보냈다. 보령현주교면 관창리의 해창마을에 조창이 있었으며, 남포현웅천읍 관당리 무창포에 조창이 있어 세곡을 모아 공세곶창으로 보냈다. 이 외에도 조창이 여러 곳이 있었다. 또한, 충청도 해안을 통과하는 조운선(漕運船)의 보호와 관리는 충청수사가 관할하였다. 따라서 전라도 등지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조운선의 관리도 중요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보령현은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3천 1백 27결이요,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팥·메밀·밤·목화이다. 토공은 지초·종이·자리·잡깃·족제비털·여우가죽·삵괭이가죽·잘[산달피(山獺皮)]·수달피(水獺皮)·참가사리[세모(細毛)]·어교(魚膠)·숭어·상어·홍어·조피나무열매·감이고, 약재(藥材)는 인삼·겨우살이풀[맥문동(麥門冬)]·단너삼뿌리[황기(黃蓍)]·백출(白朮)·속서근풀[황금(黃芩)]이다. 어량(魚梁)이 5이고, 염소(鹽所)가 3이고, 자기소(磁器所)가 1이고, 도기소(陶器所)가 1이다.”라고 하였다.

남포현은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2천 6백 68결이요, 토의(土宜)는 기장·벼·콩·조·메밀·보리·삼·모시·가는대·왕대이다. 토공(土貢)은 자리·참가사리·지초(芝草)·황각(黃角)·족제비털·잣·감·붉은 큰새우[홍대하(紅大蝦)]요, 약재(藥材)는 병풍나물뿌리[방풍(防風)]·녹용(鹿茸)·연밥·목향(木香)이요, 토산(土産)은 은어[은구어(銀口魚)]·신감초(辛甘草)·대합조개[생합(生蛤)]·낙지이다. 어량이 3이요, 염분(鹽盆)이 18이다. 자기소가 1이요, 도기소가 1이다.”라고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보령현의 토성(土姓)은 최(崔)이고, 망성(亡姓)[한 고을에 토착하여 살다가 없어진 성씨]이 장(張)·임(任)·이(李), 촌성(村姓)이 문(文)·진(陳)·유(兪)·나(那)였다. 남포현의 토성은 임(任)·백(白)·이(李), 차성(次姓)은 유(庾)·현(玄)·문(門)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보령현의 향교는 현 동쪽에 있었고, 사직단은 현 서쪽에 있으며, 문묘는 향교에 있고, 성황사는 지을현(地乙峴)에 있으며, 여단(厲壇)은 현 북쪽에 있었다. 사원으로는 1686년(숙종 12) 사액(賜額)을 받은 화암서원(花巖書院)이 있으며, 서원에는 이지함(李之菡)[1517~1578]·이산보(李山甫)[1539~1594]·이몽규(李夢奎)[1510~1563]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남포현에는 향교가 현 동쪽 400m에 있었고, 사직단은 현 서쪽, 문묘는 향교에, 성황사는 현 남쪽 4㎞ 지점에, 여단은 현 북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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