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24
한자 麗嚴
이칭/별칭 대경대사(大鏡大師),대경(大鏡),현기(玄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강종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862년연표보기 - 여염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870년 - 여염 출가
몰년 시기/일시 930년연표보기 - 여염 사망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보리사 주지

[정의]

고려 시대 보리사 주지를 역임한 선승으로,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출신의 무염의 제자.

[개설]

여엄(麗嚴)[862~930]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동한 선종 승려이다. 보령시 남포면 출신으로 9세에 출가하여 19세에 구족계(具足戒)[승려 계율로 불교에서 비구와 비구니가 받는 계율을 지칭하는 용어]를 받았다. 숭암산 성주사(聖住寺)에서 무염(無染)[800~888]으로부터 수년 동안 수행하였다. 887년(진성여왕 1) 영각산(靈覺山)에 있는 심광(深光)에게서 수년 동안 배웠다. 그 후 당나라로 건너가서 운거(雲居)의 지도를 받았으며, 909년(효공왕 13)에 귀국하였다. 고려 태조의 천거로 보리사(菩提寺)에 주석(駐錫)[승려가 포교하기 위하여 어떤 지역에 한동안 머무름]하였으며, 930년에 69세로 입적하였다.

[활동 사항]

남포면 출신인 여엄은 9세에 무량사로 출가하여 화엄학을 배웠고, 이후 선종의 성주사 무염으로부터 수학하였다. 무염이 입적한 뒤에는 사형인 심광(深光) 문하에서 선을 공부하였다. 890년을 전후한 시기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이엄과 함께 운거(雲居) 도응(道膺)의 지도를 받았다. 여엄은 도응의 선법을 수용하고, 909년에 약 20년의 구법(求法)과 유력(遊歷)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전란으로 충주 월악산과 경상북도 영주시에 머물다가 소백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풍기의 호족인 강훤(康萱)의 귀의를 받고, 고려 태조(太祖)[재위: 918~943]의 초청을 받아 왕궁에 나아가 법을 설하였다. 태조는 선사에게 경기도 지평(砥平)[현 양평] 연수리 보리사에 거주토록 하였다. 여엄은 보리사에 주석하면서 미지산문을 개창하고 불법을 진작하였다. 제자로는 융천(融闡)·흔정(欣政) 등 500여 명이 있었다.

수미산문(須彌山門)의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864~917],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870~936], 법경대사(法鏡大師) 경유(慶猷)[871~921] 모두 891년에서 896년 사이에 운거 도응의 법을 받았는데, 이들을 사무외대사(四無畏大士)[두려울 게 없는 경지에 이른 네 명의 큰스님]라고 한다.

[상훈과 추모]

고려 태조가 ‘대경(大鏡)’ 시호와 함께 ‘현기(玄機)’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보리사지 대경대사탑(菩提寺址 大鏡大師塔)이 여엄의 사리탑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