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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80
한자 李時昉
이칭/별칭 계명(季明),서봉(西峯),충정(忠靖)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94년연표보기 - 이시방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이시방 연성군에 봉해짐.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이시방 이괄의 난 반란군 토벌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이시방 정묘호란 때 순검사로 군량미 조달
활동 시기/일시 1632년 - 이시방 한성부의 좌·우윤, 산릉도감 제조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이시방 나주목사에서 전라도관찰사 승진
활동 시기/일시 1641년 - 이시방 제주목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44년 - 이시방 흉서사건 피해를 입음.
활동 시기/일시 1645년 - 이시방 호조참판으로 대동법 주장
활동 시기/일시 1647년 - 이시방 병조참판 임명, 가선대부에 승계(陞階)
활동 시기/일시 1648년 - 이시방 공조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49년 - 이시방 산릉제조·형조판서·한성부판윤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50년 - 이시방 사은사의 부사로 청나라 파견
활동 시기/일시 1659년 - 이시방 호남 지방 대동법 실시 주장
몰년 시기/일시 1660년 - 이시방 남한산성 개수
몰년 시기/일시 1660년연표보기 - 이시방 사망
유배|이배지 유배지 -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묘소|단소 이시방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지도보기 솟재[牛峙]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연안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병자호란 전후에 활약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 세거한 연안 이씨의 입향조.

[개설]

이시방(李時昉)[1594~1660]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이며 충청남도 보령과 홍주 지역에 세거한 연안 이씨 입향조이다. 강화도를 방비하고 청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힘썼으며 남도에 대동법을 주장하는 등 병자호란 전후에 활약하였다.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명(季明), 호는 서봉(西峯)이다. 아버지는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1557~1633], 어머니는 인동 장씨 증참판 장민(張旻)의 딸이다. 부인은 청주 이씨 이수검(李守儉)의 딸이다. 이시방은 충청도 홍주[현 충청남도 홍성군]의 세거 사족이었던 청주 이씨 이수검의 외동딸과 혼인하면서 처가와 인연이 있는 홍주에 터를 잡게 되었는데, 홍주와 인접한 보령에는 묫자리를 정하면서 보령 지역에 후손들이 세거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활동 사항]

이시방은 인조반정의 공신 연평부원군 이귀의 세 아들 중 셋째 아들이며, 1623년 아직 유생일 때에 아버지와 함께 반정에 가담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인조(仁祖)[재위: 1623~1649] 즉위 후 이듬해인 1624년에 벌어진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고, 요직에 있으면서 중책을 맡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군량미를 조달하고 산성을 수축(修築)하는 등 국난 극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중 즉시 군사를 동원해 남한산성으로 오지 않았다는 죄로 정산(定山)에 유배되었다.

1640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제주목사가 되었다.1641년 제주도에 안치(安置)[조선 시대에, 먼 곳에 보내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게 주거를 제한하던 일. 또는 그런 형벌]되어 있던 광해군이 죽자 손수 염습하였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받았다. 효종(孝宗)[재위: 1649~1659]은 이시방을 신뢰하였지만, 결국은 체차(遞差)[관원(官員)의 임기가 차거나, 또는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갈아서 임명함]되었다. 그러나 곧 다시 호조참판이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였고, 이후 병조참판,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50년 사은사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52년에 역모를 일으킨 김자점(金自點)[1588~1651]과 평소 친분이 있었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현종(顯宗)[재위: 1659~1674]이 즉위하면서 공조판서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고, 남한산성을 개수하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시방의 아들 이관(李慣)의 신도비명에 아버지 이시방이 홍주의 옛 집에서 별세하니 유의(遺意)에 따라 보령(保寧) 효치(孝峙)에 있는 선영 옆에 장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남구만, 『약천집』]. 효치는 지금의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솟재[牛峙]이다. 이곳에 있던 이시방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청화백자 지석(誌石) 6매가 수습되었다. 1660년(현종 원년) 아들 이항(李恒)[1628-1700]이 짓고 숙종(肅宗)[재위: 1674~1720] 대 문신이자 당대의 명필가였던 이정영(李正英)[1616-1686)이 글씨를 썼다. 지석의 전면에 ‘행호조판서연성군이공시방묘지(行戶曹判書延城君李公時昉墓誌)’, ‘비정경부인청주이씨부장재계사십월(妣貞敬夫人淸州李氏祔葬在癸巳十月)’, ‘공오(共五)’ 등의 기록이 있어, 부인 청주 이씨(淸州 李氏)를 합장한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대전광역시향토사료관[대전시 중구 문화동 145-3]에 보관되어 있다.

[학문과 저술]

저서에 『서봉일기(西峯日記)』가 있다.

[묘소]

묘소와 신도비가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솟재[牛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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