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41
한자 金南浩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60년연표보기 - 김남호 출생
몰년 시기/일시 1424년연표보기 - 김남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501년 - 증손 김극성이 묘비를 세움.
묘소|단소 김남호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죽정동 독정 지도보기
성격 선비
성별
본관 광산

[정의]

충청남도 보령에 정착하여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어 광산 김씨가 보령의 주요 가문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닦은 선비.

[개설]

송도에서 태어난 김남호(金南浩)[1360~1424]는 아버지가 조선 건국기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이유로 자결하자 귀향을 포기하고 보령에 정착하여 광산 김씨가 보령의 주요 가문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닦았다.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아버지는 전라우도 도만호(都萬戶) 김성우(金成雨)이다. 증손자는 우의정 김극성(金克成)[1474~1540]이다.

[활동 사항]

김남호김성우의 장남으로 아버지 김성우가 전라우도 도만호로 보령에 내려올 당시 함께 호군(護軍)으로 활약하였다. 아버지가 왜구 토벌 이후 불사이군의 충절로 자결하자 고향 송도로의 귀향을 포기하고 보령에 정착하였다. 증손 김극성이 새긴 묘비에 의하면 김남호는 “부자이면 교만해지고, 교만은 즉 원망이 많은 것이니 부자란 원망이 많아져서 화를 취하는 길이다” 하며 지나친 탐욕을 경계한 인물이었다.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쓴 김극성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김성우가 아들 김남호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왜적을 여러 번 무찌를 때에 저들이 아무리 못된 무리들이지만 인명을 많이 살상한 것은 도가에서 꺼리는 일이니 후대들은 오직 덕을 닦기를 힘써 덕을 보존하는 일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공[김남호]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환난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한다.

흉년이 거듭되던 어느 때에 제주에 살던 고씨 부인이란 사람이 찾아와 전 재산과 딸을 김남호에게 바치며 목숨이나 이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한 일이 있었다. 김남호는 그녀가 바친 것을 뿌리치고 집 안에 들여앉혀 살 수 있게 해 준 다음, 그 딸은 보령에 사는 강씨 집안과 혼인시켰는데, 그 딸이 낳은 아들이 대신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김남호는 행실이 고명하고 덕이 후하였다. 이러한 가풍이 후세에 이어져 증손 김극성이 우의정에 오르는 등 광산 김씨는 보령을 대표하는 가문이 되었다. 김남호는 64세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묘소]

충청남도 보령시 죽정동 독정에 있다. 증손자 김극성이 1501년에 세운 묘비가 있다. 충청남도 보령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묘비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